그날 밤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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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5-07-06 11:50 조회1회 댓글0건본문
오랜만에 형제자매들과 동네에 사는 조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삼겹살집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고기를 구웠다. 다들 나이를 먹고, 사는 곳도 다르고, 살아온 시간도 제각각이지만, 이렇게 함께 둘러앉은 자리는 피붙이의 온기를 새삼 되새기게 했다.
식사가 끝나자 자연스레 2차로 노래방에 갔다. 서울에만 가면 지인들과 늘 마지막은 노래방에서 마무리하곤 했던 나지만, 정작 아내와는 한국살이 15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자리를 함께한 적이 없었다.
낯선 공간, 번쩍이는 조명, 벽을 울리는 음악 사이에서 아내는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조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마음 한켠이 뜨끔했다.
오늘따라 아내의 얼굴이 낯설 만큼 오래된 기억과 겹쳐졌다. 마치 45년 전, 흙먼지를 일으키며 뜨락또르를 타고 시집오던 그날의 모습 같았다. 수줍지만 단단한 결심이 서린 눈빛, 그 빛이 지금 노래 부르는 아내의 눈동자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아내에게 미안해졌다.
한국 땅에서의 지난 15년, 우리는 아파트 청소, 식당일, 현장 잡일 등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그 고단한 삶 속에서 가장 무거운 짐은 늘 아내의 몫이었다.
월세, 전기세, 가스요금, 자식들 용돈까지—지로용지를 들고 농협 창구 앞에 서 있던 아내의 굽은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든 생계의 무게를 아내는 묵묵히 감당해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사내라고, 선비라고, 한 번도 내 손으로 10만 원을 아내 손에 쥐여준 적이 없었다. 월급을 받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이 모임, 저 모임 기웃거리며 제멋대로 살아왔다. “나는 남자니까”, “나는 선비니까”라는 허울 좋은 말로, 진짜 삶의 책임은 슬그머니 피해왔다.
고향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봄이면 삯모를 심고, 가을이면 남의 벼를 벴던 아내. 겨울이면 떡을 만들어 시장에 나가 팔던 그 손. 나는 그 손의 수고를, 그 지난한 생계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다.
단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소파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자식들, 동생들, 조카들 앞이라 쑥스럽고 부끄러웠지만, 노래 부르는 아내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이 빈털터리 선비하고 45년을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아내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노래를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미소가, 그 노래가 내게 들려주는 위로라는 것을.말보다 따뜻한 위안, 세월이 건네는 오래된 악수 같았다. 그날 밤, 나는 비로소 한 사람에게 진심을 전했다. 늦었지만 꼭 해야 할 고백을, 45년을 묵혀두었던 그 말을,
아내의 노래가 흐르는 작은 방 안에 조용히 풀어놓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오래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사나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왔던 내 마음속 가장 진실한 고백이었다.
/신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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