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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아가는 간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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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4-11-02 16:20 조회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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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조선어 공부를 하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에 빠져 입귀가 실룩거린다. 내가 우리글을 읽기 시작한 것은 7살 때 아버지께서 출장길에 "꾀 있는 까마귀"란 그림책을 사다준 후부터이다. 

 

유치원에서 ㄱㄴㄷㄹ,ㅏㅑㅓㅕ를 겨우 배운 나에게는 무리한 독서였다. 받침이 들어간 단어들은 읽지 못하면서도 그림 밑의 짧은 글들을 천천히 반복하여 읽었다. "이도 나지 않은 애가 콩밥 먹는" 격이긴 했어도 어쨌든 열독했다.

 

지나칠 정도로 그림책에만 빠져있는 나를 보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셨다. 그때로부터 아버지께서는 정기적으로 새 책을 사다줄 때마다 꼭 한 번씩 읽어주신 다음 나절로 반복해 읽어보게 하셨다. 나는 새 책을 사다 줄 때까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 읽었다기 보다 그림을 봤다는 게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나는 유식한 부모의 슬하에서 마음껏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행복하게 자랐다. 독서나 공부환경이 친구들 보다 우월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시나리오 각색 연출을 담당하시여 심청전, 춘향전의 한 단막을 시골무대에 올리시기도 하셨다. 그 극본들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고전 이야기였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우리집은 18평방 땅집 아파트였다. 비좁은 집의 웃방 한쪽벽면은 책으로 꽉 찬 책장이 차지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많은 책들이 소실되기는 했지만 책장속에는 많은 문학도서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책 읽기에 각별한 애착을 가졌다.

 

아버지께서 수십 년간 연변일보를 주문해보신 덕에 매일 신문 읽기가 방과 후 나의 오후 과제였다. 내가 자란 시골에는 신문이 아침이 아닌 점심에야 배송되였다. 아버지께서는 저녁이면 신문에서 좋은 글을 오려내여 책을 묶어 소장하셨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읽을 책도 별로 없던 소학교 시절에 아버지의 그 소장품은 나에게 좋은 도서였고 교재였다. 소학교에서 다른 애들은 무용 조나 음악 조, 도화 조, 체육 조에서 귀여움을 받을 때 나는 독서조에 편입 돼 책만 만지작거렸다.

 

시골 탄광마을에서 자란 나는 중학교 입학부터 한족 반에 가게 될 위기에 몰렸었다. 탄광에는 조선족보다 한족들이 많아서 하나뿐인 중학교에는 한족 반은 다섯 개나 되였지만 조선 반은 한개 뿐이였다. 3개의 소학교에서 온 조선족학생 수가 애매하게도 한개 반은 넘쳐나고 두 개 반을 하기에는 모자라는 수였다. 한족 반에 가고 싶은 학생들을 우선으로 일부 학생들이 한족 반으로 편입돼 갔다. 공부를 한다하는 애들의 다수가 한족 반으로 간다는 소문에 나의 어머니도 나를 한족 반으로 데리고 가라고 성화셨다. 앞으로 중국에서 살려면 한어가 능통한 게 유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조선어가 좋은데 더 이상 조선어를 배울 수 없는 것이 싫다고 눈물콧물을 쏟으면서 고집부렸다. 착하게 부모님 말씀만 따르던 나의 첫 반란으로 나는 조선족반에서 초중과 고중을 졸업하였다.

 

아마도 나의 작가의 꿈은 초중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선생님들로 부터 편과(偏科)하지 말라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다른 학과 보다 조선어 공부에 욕심이 많았다. 헷갈리는 단어나 조사(组词)에 대해서는 작문책에 적어 선생님께 자문을 신청해서 소화하였고 단문 짓기 숙제는 여러 개의 단어를 한개 문장에 넣어 작문을 짓기도 하여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선생님의 칭찬은 숫기가 많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평소 모르는 것들을 가지고 발뼘발뼘 교무실을 기웃거리다가 선생님께 개별지도를 받았다.


77년 대학입시 실패로 현실은 나에게 너무 일찍 꿈을 상실토록 했다. 내가 원하지도 적성에 맞지도 않는 중등전문학교 간호학과에 가게 된 후부터 현실과 나의 꿈 사이의 간극이 멀어져 갔다. 그후 간호사시절에는 그래도 실무책과 우리 글 잡지 읽기를 병행하였지만 외국바람에 휘말려 돈 벌려고 온 한국 생활에서 꿈의 복원이 영 불가능해졌다. 핑게 같지만 힘든 외국 살이에 고달픈 이 몸을 잠으로 달래느라 기계적인 삶을 살다보니 책 없는 세상에서 너무 허송세월했다.


나는 한국에서 간병 일을 하고 있다. 간병일은 몸도 마음도힘든 직업이다. 2020년 코로나가 덮치고 병원에서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출입금지 외출금지"란 강박적인 방역으로 병원문은 폐쇄되였다. 잠겨진 출입문앞에는 군사초소의 보초병처럼 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다.


간병인은 일상을 송두리채 빼앗겼고 공포에 시달렸다. 보통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그런 여유와 공간도 없이 한 달이 갈까? 두 달이면 끝날까? 하는 기대 속에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였다. 추석이 다가오던 어느 날, 바람에 실려 가는 구름처럼 왠지모를 설음과 외로움에 나는 마음마저 피페해지며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몰려오는 감정에 밀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처음으로 "코로나에 갇힌 간병인의 삶"이란 글 써보리라 마음먹었으나 손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자기 변명 속에서 머리에는 어느덧 새치가 늘고 기억은 깜박깜박 해진데다. 손에서 책 놓은 지가 오래되여 글 쓰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노트하나 살 수 없어 찢어낸 달력장과 쇼핑백으로 연습책을 만들어 겨우 문장같지 않은 글을 썼다. 처음으로 쓴 억망진창인 글을 수정하고 정리하여 휴대폰에 타자해 위챗계정에 올렸다. 변변찮은 글인데도 이외로 많은 간병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 공유되면서 댓글과 "좋아요"를 폭발적으로 받았다.

 

한민족신문에 게재되였고 동영상으로 제작하였다. 무엇보다 목소리를 낼 통로가 없었던 간병인의 마음이 요행 세상과 만났고 간병인의 삶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넋없이 간병 일만 하다가 그때로부터 나는 외로움을 글로 달래였다. 독서실이나 서재가 아닌 환자의 병상 옆에서, 밤에는 불빛을 찾아 복도에서 책 읽고 글을 썼다. 나는 병원 옥상에서 글감이 잘 떠오르기도 했다. 이른 아침 옥상에서 걸으면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구상을 했다. 글귀가 떠오르는 대로 휴대폰에 중얼중얼 녹음해 놓고 다음날 새벽 3~4 시경 환자가 잠자는 고요한 새벽에 이어폰으로 전날 녹음을 들으면서 휴대폰에 글을 타자하여 정리하였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외로움에 몸부림하는 환자들과 간병인들의 어려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무너져가는 요양병원의 일상 "이라는 글을 한민족신문에서 국회에 추천해 주셨다. 국회 보건지위원회에서 발간한 "코로나 시기 비대면 면회"라는 정책에 채택되여 사상 처음으로 유리벽을 사이 둔 눈물겨운 환자면회가 시작되였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민석 위원장으로부터 감사인사와 더불어 상까지 받았고 나는 해냈다는 만족감에 행복했고 글을 쓸 용기와 보람을 가지게 되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작가의 꿈은 내 가슴에 아쉬움으로 오랫동안 옹송그려 있었던 것 같다. 글쓰기를 시작하니 쓰고 싶은 글이 수없이 많았다. 간병인의 삶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소명을 안고 글을 쓰고 있을 때 "재한 중국동포 애심간병인 총련합회"의 초대를 받고 문화관팀에 합류했다.


하루 300여개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동포간병인그룹에서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매일 "오늘의 좋은 글"을 올리고 언제든 도움을 요청하는 동포들을 도와나섰다. 문화관리팀은 순수 동포간병인들로 구성되여 6000여명의 회원들을 위하여 무료봉사를 하고 있다.


새로 취업하는 동포 간병인들의 한국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총회의 제안으로 간병인 실무교육 준비를 해왔다. "석션~가래뽑기(吸痰), 피딩~콧줄주입(鼻食) , 쏘아~욕창(褥疮), 드레싱~ 상처소독(换药), 등 상용어를 챠트로 번역 정리하고 욕창관리, 치매와 섬망증, 온열치료와 랭열치료등 간병인이 알아야하는 전문지식을 교육재료로 편찬하여 홈페이지에 올렸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진달래에 담고 일상의 소중함은 벚꽃 사랑으로, 내 기억속의 후미진 곳에 숨어버린 모든 이야기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감동 이야기, 간병인의 억울한 사연, 한국사회에서 지켜야 할 례의와 법률적인 상식을 글로 써서 "오늘의 좋은 글"에 올렸다. 나는 글 쓰기 힘으로 간병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전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간병인들이 필요한 부분을 글로 해결해주는 것이고 글로 간병인들의 타향살이 외로움과 이방인의 아픔을 달래주는 것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한 요양병원에서 방역관리 소홀로 간병인 과반수가 코로나 확진을 받고도 현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친구의 제보를 받았다. "친구가 울고 있다"는 글을 매체에 발표하고 총회와 손잡고 동포단체와 정부산하 기관, 여러 언론사에 제보하여 간병인 구출에 나섰다. 연변의 톱스타 이옥희 선생님의 도움으로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리고 동포신문사의 유튜브 방송을 통하여 동포간병인들의 피해를 세상에 알렸다. 피해 간병인 당사자들의 뜻대로 격리할 수 있는 집을 구하여 간병인들이 현장을 탈출하여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총회에서 출간해준 "오늘의 좋은 글" 단편집에 글 다섯 편이 게재되여 내 글이 온라인을 넘어 병원밖으로 나가 더 많은 독자들께 전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90여편의 글을 문화시대 연변여성 청년생활 로인세계 등 여러 신문, 잡지와 모바일 매체에 발표하고 여러 편의 수기가 kbs 한민족방송에서 우수작으로 발표되였다. "간병인이 전하는 간병 이야기"KCNTV한한중방송에서 짧은 영화로 제작되여 시청자들과 만났고 우리는 거리에 내몰리고 있다"도 조글로에 올린 글의 클릭수가 만회에 가까워 올때 나의 목소리가 이 많은 사람들한테 전해진다는 긍지감에 마음이 설레였다.


20234, 한민족신문 창간 기념회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표창장을 수여 받은데 이어 5월에는 애심간병인총회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동안의 노력과 공로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큰 격려가 되였고 어깨 또한 무거워 졌다.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으면서 오늘의 삶이 행복하다. 이런 영예의 뒤를 따르는 칭찬은 한결 같이 "어쩜 한국 말을 그리 잘하세요."하는 뻔한 말이다. "나는 조선족이고 연변녀자인데 우리말을 당연히 잘하죠." 조선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에 가슴벅찬 나의 대답이다.


나의 본업은 간병이다. 공식적으로 문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내가 직업이 아닌 글쓰기를 꾸준히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잘 하려면 엄청난 노력을 쏟아야 한다. 나의 글은 아름다운 수식어나 멋있는 문장이 없는 아마추어 수준이다. 많이 배워야 하고 작가다운 글도 쓰고 싶다. 이국 타향에서 고향의 시래기 된장국 맛을 잊을 수 없듯이 우리말 우리글은 나의 희망이다.


나는 지금도 "연변녀자 ×××입니다"하고 매주 한편의 글로 간병인들과 만난다. 외래어가 많은 한국 신문보다 연변 방어가 섞여 있는 "오늘의 좋은 글"을 더 많이 읽어주는 간병인들이 고맙다. 매주 수백명 독자들과 만나고 내 글이 기다려진다는 댓글을 읽으면서 내가 조선어를 배운것에 희열을 느낀다. 나는 우리글을 쓰면서 위로 받고 즐거움을 향수한다. 한국사회에서 "나는 조선족이고 연변녀자입니다." 하고 당당하게 살고 있다.


멋진 가치를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참 많다. 그들의 삶을 살짝 엿보며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보며 우리글을 사랑하면서 간병이라는 업종에서 나만의 자부심으로 조선어의 가치를 한층 더 빛내어 가리라 다짐한다.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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