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아파트 지하계단이나 주차장 또는 빌라 주위에는 묶어놓은 자전거들이 흔하다. 우리 집도 자전거 두 대가 아파트 주차장에 보관되어 있다. 생명이 없는 이 자전거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며 50년을 함께 해 온 자전거다.
40년 전,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그해 현성 조선족중학교가 폐교되었다. 그 시절에는 시골 학생들이 중학교를 다니려면 대부분 십리나 넘는 먼 길을 걸어서 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나는 아버지께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돈이 없다면서 사주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변변치 않은 신발을 신고 매일 10리 길을 뚜벅뚜벅 걸어 한족중학교에 다니었다.
비오는 날 시골길을 혼자 걷다보면 무섭기 그지없었다. 길목에는 묘지도 많았다. 묘지를 지날 때는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온몸이 오싹해나며 갑자기 묘지의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 올 것 같은 무서움이 엄습 해 올 때도 있었다.
그해 겨울방학이 돌아왔다.
“애야, 볏짚도 많은데 가마니를 짜서 팔아 봄철에 나가 자전거를 사야지.”
“엄마, 동생 조카는...”
“애도, 참 별 걱정을 다하네.”
어머니께서는 내가 4학년 때 마흔다섯에 동생을 낳았다. 한 달이 지나 형수님도 조카를 낳았다.
불쌍한 동생은 삿자리를 편 방에서 살살 기어 다니고 어머니께서는 조카를 등에 업고 아홉 식솔의 끼니를 치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헛간에서 가마니틀을 가져다 방에 설치해 놓고 일군들이 일터에 나가면 가마니를 짜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집마다 부업으로 가마니 짜기가 유행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볏짚다발을 탈탈 털어서 짚 검불을 손으로 쏘옥쏙 가린 다음에 물을 뿌리었다. 그리고 새끼줄을 꼬아서는 가마니틀에 엮어놓는다. 바디로 좌우로 나눌 때 내가 짚을 바디 아래로 넣어주면 어머니는 바디를 내리쳐서 가마니를 짠다. 바디치는 어머님과 바늘대질을 하는 내가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쉽게 가마니 짜진다. 그러다 나는 바늘대에다가 짚을 물려 가마니틀에다 찔러 넣는다는 것이 어머니 손등을 찌르곤 하였다.
“엄마, 아프지? 난... 걸어 다닐래.”
“애야, 내 손등은 굳은살이야. 괜찮아. 어서...”
어머니는 다시 바늘대를 내 손에 들러 주었다.
후에 나는 동네에서는 가마니 짜는 선수가 되었다. 나는 바늘대가 안보일 정도로 빠르게 짚을 섬기고 어머니께서는 바디를 ‘쿵-쿵’아래로 내리치면서 가마니 바닥을 다진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와 호흡이 맞아 40분이면 가마니 한 장씩 짜냈다.
그 시절에 가마니 짜기가 왜 그리 싫었는지. 섣달그믐깨나 기마니 짜기를 끝내고 가마니틀을 접어서 치우게 되는데 그때는 왜 그리도 시원하고 개운하든지.
그해 겨울, 가마니 팔아 백 원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그 돈 때문에 집안에 풍파가 일어났다.
“여보, 돈 5원만 주소.”
“애 아버지, 이 돈은 어떻게 번 돈인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투실 때 나는 말리지 못하였다.
“뮛, 뭐엇이 어째?”
아버지는 와닥닥 일어나 부엌에 내려가 찬장위에 놓여있는 대병을 들고 부엌문을 열고 토방에 던졌다. ‘쨍강’소리와 함께 대병이 깨지었다.
그때 아버지는 정말 화가 나 씩씩거리셨다. 그렇게 화난 아버지 모습을 처음 봤었다. 아버지는 방안에 올라 앉아 담배쌈지를 꺼내고 손으로 알맞게 찢어낸 종이 위에 한대 분량이 되도록 담배가루를 어림해서 말았다. 혀를 쑥 빼 종이 끝에 침을 발랐다. 배가 약간 불룩한 담배 한 개비가 만들어졌다. 그 담배가 입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 담배에는 침이 촉촉하게 묻어 있었다. 쩝쩝 입맛을 다신 아버지는 담배를 입꼬리에 물고 성냥을 그었다. 아버지는 숨을 씩씩 거리며 담배연기를 소리 나게 뿜어냈다. 그러나 화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아, 나 원 참! 사람 나고 돈 생겼지 돈이 생기고 사람이 나온 것이 아니오. 하늘이 구멍이 생겨 술을 내렸으면...”하며 연신 말하였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 비오는 날이면 나의 손에 30전을 쥐여 주면서 술을 사오라고 심부름 시켰다. 그러다 가난한 처지에 돈 백 원이 생겼으니 술 닷 근을 사려고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돈을 내놓지 않았다.
며칠 후 형님께서 백화점가서 ‘백산’표 자전거를 사왔다. 나는 운동장에서 자전거 배우기를 시작하였다. 형님이 뒤에서 잡아주고 밀어주고 몇 시간의 사투 끝에 드디어 혼자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처음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너무 좋아서 빨리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교하고 동네에 들어서면 일부러 손잡이를 잡고 딸라랑...딸라랑... 소리를 내었다.
자전거를 배운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내리는 것조차도 힘들었는데 한번은 친구를 뒤에 등받이 안장에 태우고 내리막길을 달렸으나 서지는 못하겠고 그냥 계속 달려가다가는 뒷 브레이크를 잡는다는 것이 앞 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자전거 타이어 빵구도 나고 따르릉 소리 나는 벨도 찌그러지고 부서졌다. 나도 왼쪽 팔꿈치 쪽을 심하게 다쳤다.
그때 보통 사람들은 자전거 한번 타보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전거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덕분에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결혼하고 세간나갈 때 형님께서는 자전거를 나에게 주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고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도 다닐 수 없는 샛길도 어디든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또 아내는 떡 가게를 했었는데 아침마다 식당에 찰떡배달을 다녀야 하니까 그 당시 짐바 자전거가 우리 집의 보배였다.
자전거는 내 인생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잇텀이 되었고 내 체력을 지키고 내 건강을 지키는 친밀한 친구이다.
젊은 시절에는 산길을 올라갈 때는 체인이 끊어져라 페달을 밟아 오르고 내리막길에서는 속도를 내어 내려갈 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행복시간이었다.
중년 시절에는 고갯길을 오를 때는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밟아 오르면서 정체 모를 곤충이 얼굴에 와서 퍽! 부딪치고 가는 일이 많았고 또는 벌레 먹는 일도 있었다. 내리막길에는 브레이크를 꽉 잡고 속도를 늦추었지만 종종 자전거와 함께 구르거나 나무에 처박혀 팔, 다리, 손바닥이 모두 까지고 피가 철철 흘러 넘쳤다.
지금은 고개를 오를 때는 페달이 고장날까싶어 끌고 올라가고 내리막길에서도 끌고 내려간다.
인생을 살면서 젊은 시절에는 명예를 위하여 페달을 밟았고 중년 시절에는 자식을 위해 팔다리뼈가 녹도록 가로등도 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은 좁을 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페달을 밟았다.
이젠 내 건강을 지켜주는 거짓말하지 않는 벙어리 딱친구 자전거와 평정심을 갖고 안락하게 살도록 준비한다.
인생에서 타는 자전거는 브레이크도 없다. 균형을 잃으면 넘어진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조건 달리는 것보다 균형을 맞추어 산다는 것은 중요하다.
오늘도 길이 있어 나는 나의 친구 자전거와 함께 한국 도로에서 달린다. 바람을 헤치고 새로운 풍경속에서 균형 잡힌 행복자전거를 타고 세상을 향해 마음껏 달려본다.
/신석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