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살아가는 88세 노인의 인생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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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12-11 02:52 조회32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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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왕청현 림업국에서 정년퇴직한 올해 88세에 나는 김련순 노인은 퇴직 후 30여 년 째 주동적으로 의무 청결공으로 나서서 봉사를 견지하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그의 아름다운 소행은 신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왕청의 “후회 없이 살아가는 석양노을”이라고 친절히 불리고 있다.
선량하고 마음씨 고운 김련순 할머니는 심장병을 비롯한 질병도 적지 않은 연세이다. 그러면서도 남의 어려움을 헤아려주고 궂은일에는 언제나 남보다 앞장서 주변에서 “마음이 비단같이 고운 할머니”로도 불린다.
왕청 2중으로부터 왕청현 맥주공장 구간의 길과 현 병원으로부터 혁명열사릉원에 이르는 길을 청소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을 발견한 김 할머니는 퇴직 후부터 여름에는 길바닥의 생활쓰레기와 건축쓰레기를 줍고 길 양켠에는 모기가 우글거리는 잡초를 정리했다. 겨울이면 빙판길을 오가는 차량과 행인들의 안전에 큰 우환을 갖다 주는 것을 발견한 김 할머니는 비자루, 삽, 괭이 등 청소도구를 마련해 가지고 빙판길청결에 나서군 한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즐긴 김련순 노인은 지금도 대퉁소를 불고 전자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교실에서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1935년에 화룡현 동성구 광동촌에서 태여난 김련순 노인은 1942년 여름에 룡정헌병대의 헌병들이 날도 밝지 않았는데 김 노인네 집에 뛰여들어 일곱 살 나는 김련순에게 날창을 들이대고 공산당의 행적을 알아내려고 사탕으로 얼리려고 했으나 성사하지 못하자 악에 바친 놈들은 권총을 빼들었다.
“땅”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총알이 지붕영계에 가 박혔다. 그러는 바람에 아버지는 나무도마에 얼마나 맞았는지... 아버지는 끝까지 마을을 보호하고 학동골 안의 비밀을 고수했다.
김련순 노인은 비록 어린이였으나 아버지를 보호하고 마을을 보호하였다. 하여 그는 용감한 소녀로 찬양받았고 평생 인간의 도덕을 지켜왔다. 그가 열 두살 때 뒤집 아줌마가 심한 정신병에 걸려 고생이 막심했다. 그의 남편 조용남은 당시 광동촌 농회 책임을 지고 밤낮이 따로 없이 공작이 다망했다. 김련순은 7리 길을 걸어 광동학교에 다니면서 일년 동안 밥을 지어 주면서 환자를 정성들여 보살펴 주었다.
김련순 노인은 퇴직한 첫날부터 시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였다. 해마다 8.15 노인절, 설 명절이면 사탕, 과자, 사과, 귤 등을 사가지고 노인들을 위문하는 한편 돼지고기, 밀가루 등 물만두를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재료를 갖고 가 노인들을 조직하여 운신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물만두를 비롯한 명절의 음식을 푸짐히 마련해 드리 군 하는 김련순 할머니는 노인들에게 활동실을 마련해주고저 자기 호주머니를 털었다. 가야하 예술단에는 세 식구가 여덟달 동안 로임 한푼 없이 어렵게 살아가는 가정이 있었다. 고기나 남새를 살 돈이 없는 건 물론 쌀을 살 돈마저 없었다. 이 정황을 알게 된 김련순 할머니는 여덟달 동안 쌀을 사고 고기, 남새를 사서 날라다 주어 그들 세 식구가 생계를 유지하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김련순 할머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선후로 50년 '당원메달', 성, 주, 현의 노동모범, 우수 공헌자' 훌륭한 사람'으로 평선 되였다.
이외에도 10여 만원을 재해지구 의연, 혁명열사 기념비 수건, 큰 눈이 내린 뒤에는 남 먼저 사회구역의 눈을 쳐낸 일, 가야하 예술단의 학원이 골격수술을 할 때에도 앞장서 의연한 일, 재해 지구에 만 여원을 서슴없이 내놓은 일, 이밖에도 좋은 일을 얼마나 했는지? 그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 /리강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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