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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롱재”가 오는 날은 장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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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3-26 23:30 조회3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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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롱재”들이 우리 마을에 나들기 시작한 것은 딱 광복 직후였다.

 

사소한 생필품은 그래도 한 달에 몇 번씩 마을에 드나드는 “홀롱재”에게서 물건대 물건들로 바꾸어서 활용했다. 왜서 “홀롱재”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 장사아치가 마을에 들어 왔다는 신호로 손잡이가 달린 애들의 놀이감만한 북으로 달랑달랑 신호를 하고 다니기 때문에 “홀롱재”라고 불렀다. 마치도 서울 시가지의 모퉁이에 차려놓은 벼룩시장처럼 자그마한 상자에다가 참빗이며 얼레빗이며 손거울이며 가위며 눅거리 가루 분통이며 납작한 머리핀이며 조개고약이며 검정색 물감이며 없는 게 없이 갖고 다녔다. 

 

검정색 물감은 우리 마을 철이 엄마가 도맡아 사들였다. 철이 엄마는 수시로 흰 광목 이불안을 쫙쫙 뜯어서 애들의 팬티며 고시며 바지를 해서 입히는데 흰 것을 그대로 입을 수가 없으니깐 숯 검댕이 같은 검정물감으로 물을 들인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철이의 바지 끝에서 검푸른 물색이 주르륵 흘러서 발가락 사이로 흘러 내렸다. 

 

엄마도 이모가 시집을 가는데 십전짜리 손거울을 사서 선물 하였다. 돈이 없을 때에는 알곡으로도 바꾸었다. 한여름에 식량이 모자랄 때에는 “홀롱재”가 외상으로 물건을 팔기도 했다. 왕래 장부는 자그마한 몇 장 안 되는 손바닥 크기의 마분지에 적어놓고 가을이 되기 바쁘게 외상 빚 받으려 찾아온다. 그러면 인심이 후한 동네 사람들이 척척 쌀독에서 쌀을 퍼내여 여름에 진 빚으로 주어 보낸다. 

 

어떤 날에는 현명한 우리 엄마가 딱 점심때에 마을에 찾아온 “홀롱재”에게 숟가락과 저가락을 덤으로 놓는 셈 친다며 밥 한 끼 대접한다. “홀롱재”도 인정 있는 사람인지라 엄마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챙기라고 한다. 엄마는 참빗을 골라 쥔다. 왜서인지 그 시절에는 애들의 머리에 하얀 서캐며 이가 바글바글 하였다. 참빗에 기름을 바르고 빗살이 빽빽하게 실로 묶어 놓고 빽빽한 부분을 머리에 박고서 내리 빗질하면 서캐나 이가 무더기로 빠져나온다. 지금은 사회가 발달해서 보고 죽자 해도 그런 기생충들이 자취를 감추어 볼 수 없다. 

 

“홀롱재”가 마을에 드나들면서 집집마다에 생활이 조금씩 펴이고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생활 용품이 늘어나는 것도 눈에 뜨이게 보이였다. 

 

시간이 지나고 그 장사아치들 또한 머리가 터서 팔 수 있는 물건들의 가지 수를 더 늘여서 밀차에 싣고 다니면서 야금야금 팔기 시작하였다. 기름, 간장, 소금도 팔았고 봄이면 푸르싱싱한 대파와 시금치도 팔았고 앵두며 오얏이며 돌배며 등 제철과일들을 조금씩 가지고 다니면서 팔기도 하였다. 현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거여서 교역액이 상당하였다. 닭알과 바꾸기도 하였다. 닭알 한 알이면 아버지들이 술을 마시는 알각잔에다 앵두를 두툼히 담아서 주기도 하였다. 

 

제일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일이 있는데 그때 일곱 살 쯤 되는 내가 빈집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홀롱재” 소리가 딸라랑딸라랑 들려온다. 호기심이 동한 내가 큰길가에 달려 나가서 그 “홀롱재”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상자 밑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상자 한쪽켠에 글쎄 잘 익은 오얏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말없이 방구석에 놓여있는 헐망한 경대서랍에서 미루 보아왔던 오십 전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들고 숨이 턱에 닫게 뛰어갔다. 오십 전짜리 지폐를 "홀롱" 재에게 내밀고 시뚝해서 그 오얏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장사아치는 오십 전에 해당한 분량어치로 저울질하여 나의 옷섶에다 오얏을 쏟아 놓았다. 나는 남산만한 임신배를 뒤똥거리며 집에 들어와서 구들에다 쏟아 붓고는 흥이 나서 주어먹고 엄마와 동생들에게 줄려고 일부는 남기였다. 

 

저녁에 일밭에서 집에 돌아온 엄마는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으로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비자루를 쥐여 들고는 나를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주었다. 한편으로는 "요놈의 몹쓸 계집애 응 그것이 어떤 돈인데 응 어벌주머니 크게도 그 돈으로 오얏을 사먹어 응" 하면서 말이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애가 철딱서니가 없어서 한 노릇인데 용서해주오." 하고 말려서야 엄마는 기진맥진해서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제 밸을 못 이겨서 한식경이나 오열을 터뜨렸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를 리해하고도 나머지가 있다. 50년대에 50전짜리 지폐 한 장이면 과히 큰 돈이였다. 일곱 식솔의 비상용으로 애지중지하던 돈을 글쎄 이 철부지가 "홀롱"재에게 주고 오얏을 사왔으니 엄마로서는 기가 막힌 노릇 이였을 것이다. 이일은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락인으로 찍혀있다. 

 

“홀롱재” 장사아치도 력사의 산물로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버렸다. 산간 지대의 가가호호에 생활 필수품을 공급하던 그 시대의 상업수단 그것이 기초발단으로 오늘과 같은 거미줄처럼 늘어선 얼기설기한 흥성한 상업망이 이루어진 것이 아닐가?  "홀롱재" 는 몇 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내 머리 속에 영원히 지워 버릴 수없는 진한흑백 사진으로 남아있다. 시대를 이끌던 력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발전하고 완미하게 인간세상을 이끌고 단계적 사명을 완수하면서 광명에로 나아간다. 

/남옥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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