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엄마 생신입니다. 오늘 따라 엄마가 더 보고 싶습니다. 한평생을 가족을 위해 자식들의 성장을 위해 살아오시다가 한 오리 연기로 사라져 하늘가신 엄마를 생각 할 때마다 내 가슴은 방망이로 두드리듯 세차게 들먹이고 아픕니다.
엄마 생전에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때론 투정부리고 많이 효도해드리지 못하여 후회의 눈물이 솟구칩니다.
엄마는 조선 (지금의 한국)충청북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아홉살에 외조부를 따라 중국 안도현에 정착하셨고 13세살 어린 나이에 심양봉제공장에 가서 아동공으로 일하셨고 일본 가정집 보모일도 해가면서 갖은 수모와 학대를 받다가 17살에 집에 돌아왔고 19살에 인민교사로 일하시는 아빠와 결혼하셔서 우리 네 남매를 두셨습니다. 엄마는 시집와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두시누이 그리고 사촌 시동생을 친히 키우시면서 그들 셋 모두 중점고중 중등전문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뒷바리지를 해주셔서 두 고모님은 교사직업에 종사하셨고 삼촌은 도시의 큰 회사에서 령도 직책을 맡으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중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교장 선생님께서는 시골에 학교가 없어서 분교를 세우라고 아버지를 시골에 보내셨는데 건교를 해놓고 얼마 후 병환으로 앞을 못 보는 소경이 되였고 그로부터 5년 후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엄마는 집안의 모든 가장 집물이며 책이며 놋수저까지 팔아서 아버지 병치료에 보태셨고 마지막으로 북경병원에까지 모시고 가셨습니다.60년대에 북경병원에 간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나 엄마는 아버지가 가시는 마지막 길까지 동분서주하면서 모든 정성을 다 바쳐가며 아버지를 구하려 애쓰셨지만 저승사자는 아버지를 덮치고 놓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서른여덟의 꽃나이에 과부로 되신 엄마의 어깨에 가정의 모든 짐이 떨어졌고 도시 호적이던 우리는 시골에 그대로 방치되어 농사지으며 살아가게 되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는 방황하지 않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주위에서 어린자식 넷을 키우며 고생고생 하시는 엄마가 너무도 안쓰러워 재가(改嫁)하시라고 권유도 많이 하셨지만 자식들이 이붓아버지 눈치 밥 먹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면서 이를 악물고 자식만을 지키셨습니다. 그때는 로동력에 따라 분배하는 (按劳分配)정책을 시행하는 때라 엄마는 한공(一工)이라도 더 버시겠다고 남자들이 하는 힘든 일만 골라 하셨습니다.
힌 번은 소수레를 몰고 밭에서 일하시다가 소 뿌리에 가슴이 박혀서 커다란 생채기가 생기면서 온몸에 피가 랑자하게 흘렀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아픈 상처에 된장이 지혈과 소염에 좋다며 그 짠 된장을 한웅큼 바르시고는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계속 일밭에 나가셨습니다. 그때 나어린 내가 엄마가 세상 뜬다고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얼마나 통곡하며 울었던지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여지고 눈앞에 그 정경이 떠올라 목메입니다. 그리고 차 사고로 머리를 몹시 다쳤을 때에도 병원에서 며칠간의 간단한 구급 치료를 끝내고는 또 다시 농사일에 매진하시다가 현훈증으로 밭에 쓰러지면서도 치료를 포기하고 우리 곁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이런 변을 당하면서 엄마 건강에 이상 신호가 오면서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치료를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습니다. 부득이 현성 병원에 가서 며칠간 치료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결핍 할 때라 하루 한번밖에 없는 기차시간을 놓친 엄마는 우리 넷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거 같아 40리 길을 도보로 오셨습니다. 집에 들어선 엄마의 발가락에서는 선지피가 흘렀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우리 식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엄마는 일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농사 일, 텃밭일, 마른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했으며 우리 넷을 공부시키느라 장날이면 등이 휘게 채소를 이고 지고하면서 팔아서 학자금을 어김없이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빌어먹어도 공부를 꼭 해서 아빠처럼 교편을 잡는 것이 엄마의 바람이라며 우리들한테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시골 집 부모님들 대부분이 자식들이 초중에서 중퇴하고 농사짓고 시집장가 보내는 것을 임무 완성이라 생각하지만 엄마는 아무리 생활난에 쪼들려도 학교는 그만두면 안된다면서 당신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한테 일하라는 재촉은 절대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학입시 준비할 때 오빠도 대학시험 준비로 공부했었는데 마을의 어떤 분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로동력이 제일 부족하고 째지게 가난한 집에서 두 명씩이나 대학입시 공부를 한다면서 뒷공론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동요하지 않았고 우리더러 귀를 막고 앞만 보라 다독여 주면서 혼자서 밤낮이 따로 없이 일하시면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셨고 자식들의 찬란한 앞날만 기원하셨습니다.
제가 그해에 중등전문학교에 입학했는데 저의 학비 마련을 위해 엄마는 오전에는 시장가서 채소팔고 오후이면 밭일을 하시면서 분망히 보내셨습니다. 그해에 홍수가 범람해서 채소에 듬이 끼여 감자 한 근에 2전씩 받고 팔아서 한푼 두푼 모아서 학비며 이부자리와 생활필수품을 장만해 주셨습니다. 내가 입학해서 필업할 때까지 엄마는 이렇게 밤낮이 따로 없이 일 하시면서도 바쁘시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개천에서 용 났다고 기뻐 하시였습니다.
한족 고중을 다니던 오빠가 친구를 잘못 사귀여서 한동안 갈팡질팡 했었습니다. 엄마는 회초리를 가지고 오빠의 종아리를 치면서 엄마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켜서 네가 나쁜 길에 들어 섰다며 새 길에 돌아서지 않으면 함께 죽는 길 밖에 없다며 오빠더러 엄마의 종아리를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엄격한 엄마의 교육으로 오빠는 바른 길에 들어서서 계속 공부에 열중하였습니다.
엄마는 또 아버지와 함께 살던 터전에 집 짓고 살겠다면서 낮에는 밭일을 하시고 밤에는 촌에서 꾸린 량식가공공장에서 일하시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집짓는 일은 남자들도 버거운 일이지만 엄마는 이를 악물고 친히 흙집을 지으셨습니다. 새집에서 엄마와 우리 네 형제는 석유등불을 켜놓고 아버지를 기리며 집들이를 하였습니다. 엄마는 우리한테 지식 있고 교양 있고 재간 많았던 아버지에 대하여 많은 덕담을 하셨습니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강한 모습만 보이시던 엄마가 그날 아버지가 그립고 살길이 막막해서 서럽게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고향 옛집 벽에는 지금도 엄마의 피 묻은 손자국이 꾹꾹 낙인으로 찍혀 있습니다.
엄마는 집 안팎일에 눈코뜰새 없었지만 항상 생산대의 선줄꾼 이었습니다. 지식청년들이 우리 촌에 내려오자 호장 직책을 맡으시고 그들이 농촌에서 안착하고 재교육을 잘 받도록 인도하면서 생활과 로동 모든 면에서 곤난을 이겨가도록 친자식 돌보듯 살뜰히 도와주었습니다. 명절이면 그들한테 맛있는 음식도 보내고 집체호가 춥다고 우리집 이불도 갖다 주고 누가 불편한거 같으면 제때에 진료소에 가서 치료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진에서 우리 촌에 양로원을 꾸렸는데 엄마는 또 양로원에서 관리원으로 활약하시면서 어르신들께서 따뜻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만년을 보내시도록 열심히 도와드렸고 뒤바라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떠나실 준비를 하시는 어르신들을 자기 부모처럼 배려하시고 그이들 후사도 잘 치러드렸습니다. 그리하여 가족에서 모두 기뻐하셨고 원장님도 모든 일을 엄마와 상의하고 추진해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력사당안이 회복되고 엄마가 연세가 드시면서 우리 가족은 드디어 엄마의 청춘을 눈물로 적셨던 시골을 떠났고 엄마는 현성에서 안일한 만년을 보내시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손군들을 내리내리 돌보았고 그 애들도 꼭 사회에 유용한 인재가 되여야 한다면서 가정교육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이런 강인한 정신과 교양 있는 인간이 되기에 노력하고 지식을 중요시하는 가풍으로 하여 오빠는 아버지 뒤를 이어 인민교사로 되였고 큰 동생은 고중 작은 동생은 초중을 졸업하고 삶의 터전에서 열심히 뛰고 있으며 나도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수십 년간 국영기업에서 재회과장으로 사업하면서 중앙당교본과와 북경금융학원함수반 등 공부를 하면서 부단히 자신을 정진 시키며 열심히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했습니다.
우리가족에는 큰조카내외 작은조카내외가 모두교사로 사업하고 박사2명 박사과정1명 석사1명 그리고 대학생들이 해내외에서 맡은바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위의 지인들은 우리 가족을 지식인 가족이라 부러워하면서 엄마를 이 세상에 둘도 없는 강철보다 더 강인한 여인이라 치하하군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은 우리 엄마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 듯싶습니다. 엄마의 일생은 정말로 곡절 많고 눈물 많은 드라마 같은 일생입니다. 80성상을 고생만 하시다 가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한테 시중한번 시키시지 않고 그렇게 강인하고 따뜻하고 깨끗하게 모성애로 자식들을 보듬고 지키며 사셨던 엄마의 일생은 참으로 불쌍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여성의 일생입니다.
나도 이제 황혼을 바라보는 딸로서 엄마가 피눈물로 마련해주신 보금자리에서 매일 행복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누릴 때마다 우리들의 오늘을 위하여 원망 한마디 부끄럼 한 점 없이 사시다 가신 우리 엄마, 실로 저 산과 들에 조용히 피고 지는 할미꽃처럼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한줌의 재도 남기시지 않고 연기로 사라지신 엄마, 저 하늘의 보름달처럼 환하고 고왔던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엄마 생전에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못해 드려서 너무나 가슴시립니다.
엄마 이젠 하늘나라에서 자식 걱정 하시지 마시고 손발 편히 그리고 또 편히 쉬세요. 이 딸이 엄마 곁에 가게 되는 날 이생에서 못 다한 효성 다 할 겁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은혜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큰 딸 올립니다.
2021.08.04
/김봉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