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종일 몸을 달구던 해님이 열을 식히러 서산으로 발걸음 재우친다. 철이는 하학한지 오래건만 오늘 따라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더없이 미워났던 것이다. 이모네 집으로 갈까하다가 그만두었다. 요즘 이모와 이모부는 무슨 일로 자꾸 싸운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집으로 가기 싫어도 가야했다.
철이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해님이 어느새 얼굴을 반쯤 서산 뒤에 숨겼다. 발길을 무겁게 내디디는 철이의 눈앞에는 아까 마지막 시간에 영수랑 순호랑 자기를 놀려주던 일이 떠올랐다.
"너 아버진 원래 ‘쓰레기 장사꾼이야’ 돈 많이 벌겠다야"
"그럼. 그러면서도 전번에 ‘소장’이라고 자랑했지? 거짓말쟁이 같은 게."
"아니 우리 아버지는 정말 ‘소장’급이란데…"
철이가 낯까지 붉히며 우겨댔지만 그 애들은 코웃음만 칠뿐이다.
(오늘은 정말 집에 가면 단단히 해내야겠다) 철이는 아이들에게 놀려댄 일이 분해서 이렇게 윽별렀다. 인젠 이렇게 한반의 친구들에게 놀려댄 일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서 번마다 아버지와 한바탕 해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철이는 원래 현성에서 살았댔다. 그러다가 작년에 아버지가 저수지관리국의 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이 자그마한 저수지로 이사 오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철이는 이 저수지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골처럼 느껴졌다. 삼면이 산인데다 밤이면 밖은 까막나라였다. 더구나 기가막힌 것은 함께 놀 친구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철이는 기뻤다. 그는 일찍부터 다른 애들이 자기아버지가 국장이요, 경리요하면서 자랑할 때면 부럽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버지도 남들한테서‘소장님’하는 부름을 듣게 될 것이고 반급의 애들도 부러워 할 것이다.
어느 날, 학급에서 단친가정을 통계하느라고 등록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철이는 아버지의 직무를 ‘소장’이라고 제꺽 써놓았다. 그 위력이 얼마나 큰지 원래 철이를 크게 거들떠보지도 않던 애들이 철이를 다른 눈길로 보기 시작했다.
저수지는 일년 사계절 치고 대부분 조용하기만하고 고요하기만 한데 여름 한철만 되면 들놀이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면 철이 아버지가 분망한 때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래도 놀음이 끝난 후면 깨끗이 청소해놓고 가는데 일부 사람들은 물병이요, 신문따위요, 남은 음식 등을 그대로 버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철이 아버지는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면 이런 장소를 청소하고 물병 같은 건 버리기 아깝다며 집에다 모아두었다가 팔아버리군 했다. 그런데 이 일은 인차 철이아버지가 넝마주이를 한다는 소문으로 번져 졌던 것이다.
발길을 질질 끌면서 집안에 들어선 철이는 다짜고짜로 한창 신문을 보고 있는 아버지한테 다가갔다.
"아버지, 난 아버지 때문에 창피합니다."
"엉? 너 오늘 어두운 밤에 홍두깨 내밀듯 무슨 소리야? "
"애들이 아버지를 뭐라하는 지 압니까? '퍼랄장사'래요. ‘퍼랄장사ㅡ’ 흥"
철이는 저도 몰래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이렇게 소리 질렀다.
"그런데는 왜? 참 애두"
철이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신문을 들여다본다.
"아버지 인제는 좀 그 물병들을 줍지 마세요. 돈이 얼마 된다고 그렇게 자꾸 줍는 거에요?"
"내가 뭐 돈벌이하자고 줍는 줄 아니? 위생청결을 하느라고 그런 거란다"
"그런데…"
철이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낮에 애들이 빈정대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하여 다시 한번 울먹이며 말했다.
"위생청결은 엄마가 하라하면 안돼요? 아버지는 간부가 아닌가요? "
철이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이렇게 말했다.
"애야. 위생청결은 사람마다 지켜야 한다. 알겠느냐? 그 애들이 인제 말하다가 말거다. 그러니 더는 이 문제에 신경 쓰지 말거라."
말을 마친 아버지는 또 신문에 눈길을 팔았다. 철이는 두 볼이 잔뜩 불어났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아버지가 쓰는 비닐주머니를 쓰레기상자에 깊숙이 파묻었다. 그러고 보니 속이 좀 풀렸다.
이튿날 하학하고 집에 돌아온 철이는 또 두 볼이 부어올랐다. 글쎄 아버지가 또 반주머니 물병을 모아두었던 것이다. 철이는 발로 힘껏 걷어찼다. 마치 모든 것이 이 물병 탓이란 듯.
며칠 후, 철이가 숙제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소리쳤다
"철이야 빨리 와서 봐라. 네 아버지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철이가 제꺽 고개를 텔레비에 돌렸다. 텔레비에는 기자의 취재를 접수하시는 아버지의 너부죽한 얼굴이 나왔다.
"환경위생은 사람마다 지켜야합니다. 나는 워낙 위생청결을 하느라고 한 일인데 결국 사람들에게 넝마주이를 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아들애의 불만도 자아내고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늘 기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떳떳하고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철이는 아버지를 곁눈질해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어있었다. 철이는 저도 몰래 기뻐났다. 내일이면 그 애들 앞에서 아버지 자랑을 실컷 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아까부터 창문에서 서성이던 달님이 집안에 홀랑 뛰어들었다.
/박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