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아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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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6-02-15 12:41 조회115회 댓글0건본문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 오남매는 부모도 아니고 한세대 건너뛴 할머니를, 그것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후할머니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어언 20년이 지났건만 우리 손군들은 해마다 청명과 추석에 제사를 지내고 명절마다 만나면 할머니를 그리워한다.
“꿈에 할머니를 봤소.”
“요즘 할머니 생각 나 울었소.”
“어째 날이 갈수록 할머니가 더 보고 싶소.”
부모의 리혼으로 여덟달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내가 오래동안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자라서 그리워하는 건 그럴 법도 하겠으나 친엄마 슬하에서 자란 막내녀동생이 “엄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영원히 할머니가 첫자리요.”라고 말하는 걸 보면 할머니는 우리 마음속에서 여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다.
우리 집은 아홉식구인 대가정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생산대 일로 바삐 보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질구레한 집일로 하루종일 다망히 보내셨다.
특히 할머니는 집에서 어린 손군들을 돌보면서 여러가지 일을 잽싸게 해냈다. 아홉식구의 하루삼시를 척척 해내는 건 물론이고 어린 손군들 중 한명은 업고 한명은 손목 잡고 산비탈에 있는 자류지에 가서 감자를 파고 옥수수를 뜯어 커다란 광주리에 이고 집에 와서 그 다음 끼니를 준비하였다.
할머니는 큰 손군들의 손발을 빌어가며 한달에 한번은 십여근이나 되는 콩을 물에 불궜다가 매돌에 갈아서 두부를 앗았다. 온 집 식구와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웃집들에서까지도 할머니 덕분에 생활개선을 하였다.
또한 해마다 손군들 생일이 돌아오면 흰 입쌀을 물에 불궜다가 떡방아를 찧어 여러가지 떡을 만들어 온 집 식구들을 기쁘게 하였다. 가냘픈 몸매로 아이를 업고서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잽싸게 집일을 하고 동네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집들에 불쑥불쑥 나타나 걸싸게 일을 해제끼는 할머니를 사람들은 날아다닌다고 ‘비행기아매’라 다정하게 불렀다.
할머니는 우리가 조금만 기특한 일을 해도 며칠을 두고 크게 칭찬해주었고 온 동네가 다 알 정도로 돌아다니며 자랑하였다. 일자무식인 할머니였어도 칭찬의 마법으로 우리들의 기를 팍팍 살려주었으니 참으로 사람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분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어릴 때 할머니를 엄마보다 더 좋아했고 그냥 친할머니로 알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집식구들의 나이를 맞추며 놀던 우리는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글쎄 할머니 나이가 아버지보다 열한살밖에 더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와 아버지한테는 감히 묻지 못하고 한마을에 살고 있는 친척한테 물었더니 글쎄 우리 할머니가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매일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하고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지런히 일하는 할머니, 그렇게 피곤하면서도 날이 조금만 어두우면 마을어구에서 손군들을 기다려주는 할머니가 친할머니가 아니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다시 조심조심 엄마한테 물었더니 맞는 말이라고 했다. 엄마는 우리한테 친할머니가 아니여도 다른 집 할머니보다 더 손자, 손녀를 아끼고 생각해주니 아무 내색 말고 무조건 잘해드리라고 하셨다.
1973년 8월말의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두 동생은 공사마을에 ‘9.3’운동회 보러 가겠다며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엄마한테 졸라댔다. 엄마는 낡은 운동화를 그냥 신고 가라고 했다. 그러자 동생들은 뾰로통해서 학교로 갔다.
집식구들이 한창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할머니가 묵직한 마대를 등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집마당에 들어섰다. 할머니가 마루에 짐을 내려놓자 나는 달려가 꽁꽁 동인 마대자루를 풀어제꼈다.
“와, 솔버섯이다. 우리 아매, 정말 많이 뜯었네.”
뜻밖에도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달려나오더니 마대를 번쩍 들고 두엄무지로 가서 몽땅 쏟아버렸다. 그것을 본 할머니는 너무도 놀라 엎어지듯 막 달려가서 버섯을 끌어모아 마대 안에 도로 담으려고 했다. 그러자 집으로 들어갔던 아버지가 다시 나와서 솔버섯을 막 짓밟아놓았다. 할머니가 아버지의 발목을 꽉 잡고 사정했다.
“이보게, 아애비, 이 버섯을 말리워 팔면 그래도 애들 신 두컬레는 살 수 있을 게요…”
“어머이, 지금 애들 신발 생각할 때 아이꾸마.”
아버지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할머니는 두엄무지에 풍덩 들어앉아 슬프게 울었다. 엄마가 달려나와 할머니를 일으키며 아버지가 그렇게 한 것은 한창 돌피 뽑는 일철인데 많은 사원들이 버섯 뜯으러 가기에 당원들부터 가족 단속을 잘하자고 회의를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쓸쓸한 눈길로 뭉개진 버섯을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일어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한테 다가가 “아애비, 미안하네. 애들 신발 사겠다는 생각만 하고 당원인 아들며느리 립장은 싹 잊었구만.”라고 말씀하셨다.
집일만 하며 살아 정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여겼던 우리 할머니에게도 이렇게 당원가족으로서의 책임감이 있음을 알게 되여 나는 조금 놀랐다.
이틀후 생산대에서 돌피 뽑기가 끝났으니 하루 휴식한다고 선포하자 할머니는 선참으로 모아산에 올라가 버섯을 뜯어다 말리워 팔았다. 동생들은 할머니 덕에 새 신발을 신고 생글생글 웃었다.
할머니의 다함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무탈하게 잘 자랐다. 1976년 1월에 오빠가 장가를 갔는데 한마을에 세간 나서 살았다. 그 해 가을에 떡판같은 증손자를 받아안은 할머니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집일로 그렇게 바삐 보내면서도 매일 증손자까지 보살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넉달밖에 안된 그 조카가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오빠와 올케는 병원으로 가려고 나섰다가 애기가 너무 자지러지게 울어대여 어찌할 바를 몰라 도중에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애기를 받아 포대기에서 꺼내보니 아기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애기의 온몸을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던 할머니는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빨리 돼지고기를 얻어오라고 했다.
의사도 아닌 할머니는 살아온 지혜로 애기가 앓는 것을 태독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예전에 보아온 대로 할머니는 돼지고기로 애기를 살려보려고 했다.
그 겨울에 농촌에서 돼지고기를 구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였다. 할머니의 다급한 부르짖음에 놀라서 부들부들 떨던 엄마가 그래도 머리가 빨리 돌았다.
“어머이, 우리 돼지를 잡깁소!”
“그래, 아에미, 아까워도 어쩌겠소? 애기의 명이 달렸소.”
할머니와 엄마는 녀자의 몸으로 돼지굴에 들어가서 사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돼지를 붙잡아 목에 칼을 들이박았다. 돼지가 숨이 넘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껍질이 붙은 채로 고기를 발가내여 애기 몸에 척척 붙여놓았다. 애기 몸에서 돼지고기는 갈색으로 변했고 한참후 애기 몸의 열은 내리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과단한 조치를 취했기에 사경에 처했던 아이는 살아났고 우리는 후에 그 조카를 보면 “돼지와 바꾼 아이”라고 놀려주기도 했다.
1982년 아버지께서 갑자기 병으로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1992년부터 여기저기 아픈데 많아 고통을 받았는데 제일 큰 문제는 앞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이였다.
병원에 출근하는 녀동생이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검사받아보니 백내장이 심해 수술해야 한다고 하였다. 수술하면 잘 볼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웃음을 짓던 할머니는 인차 돈이 얼마 드는가부터 물었다. 수술비용만 몇백원이라는 말을 듣고 할머니는 평생 모은 돈이 몇십원밖에 안돼 수술을 받지 못하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가 자식들과 잘 토론해 결정하라고 하니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기에 그런 부담은 절대 주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오셨음에도 어려움에 봉착하니 가족들에게 추호의 부담을 끼치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마음가짐에 감동받은 녀동생은 그 날 저녁 나에게 울먹거리며 모든 상황을 알려주었다. 경제적으로 변변치 않은 우리였지만 할머니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힘을 합쳐 할머니를 연변병원에 입원시키고 눈수술을 받도록 하였다.
나는 아이 둘을 키우며 출근하는 몸인지라 매일 병문안 가보지 못하고 며칠에 한번씩 갔는데 할머니가 어찌나 손군들 자랑을 하셨는지 온 병실 환자들한테서 숱한 칭찬을 받았다.
할머니는 손군들 덕분에 어렴풋이 보이던 눈이 똑똑하게 잘 보이는 것도 좋고 이 세상에 태여나서 처음으로 아무 일 하지 않고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 하루삼시 다른 사람이 해주는 따끈따끈한 밥을 받아먹을 수 있는 것도 너무 행복하다며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고 했다.
2002년 11월 26일,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눈만 뜨면 곁을 지키고 있는 나와 녀동생에게 “어서 출근하라.”고 손사래 치던 할머니는 91세를 일기로 두 눈을 감았다.
80세 큰고모와 중병에 시달리던 작은고모가 모두 할머니 장례식에 오셨다. 오랜만에 고모들과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게 되자 나는 살아오면서 늘 궁금했던 할머니와 관련된 몇가지 일들에 관해 물었다.
“할머니 마음속에는 어떻게 오로지 다른 식구만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왜 ‘내 살아서는 누구도 할머니를 노엽히면 안된다.’는 철칙을 내놓으시고 자식사랑보다 후할머니에 대한 효성을 더 중히 여겼어요?”
그랬더니 고모 두분이 이젠 할머니와 아버지 다 돌아가셔서 시름 놓고 들려줄 수 있다면서 번갈아가며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1912년 8월 6일, 전주 리씨 가문의 맏딸로 태여났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왕청의 어느 두메산골에서 째지게 가난하게 살아갔는데 아이가 다섯이나 되니 먹여살리기 힘들었다. 별수 없어 아홉살밖에 안된 할머니를 좁쌀 한마대를 받고 팔았는데 할머니가 팔려간 집은 한족집이여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할머니는 그냥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자 한족집에서는 한달후에 할머니를 되돌려보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돌아온 할머니를 보고 집식구들은 대성통곡하며 이젠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같이 살자고 하면서 다시는 할머니를 팔지 않았다.
그런데 몇년이 지나 자식이 여덟으로 불어나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님들은 다른 방도가 없어 또다시 열여섯살인 할머니를 입쌀 두마대를 받고 본처가 아이를 못 낳는, 나이 50이 된 령감의 집에 첩으로 보냈다.
그런데 시집 가서 첫아이는 류산되고 둘째아이는 두살에 병에 걸려 죽었다. 아이들이 잘못된 게 할머니 탓이 아니건만 할머니는 시댁의 갖은 구박을 받으며 매일 눈물로 살아갔다. 그러다가 전염병이 돌 때 늙은 량주가 련이어 돌아가고 할머니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는데 할머니는 사람들과 물으며 친정집 쪽을 향해 걷고 또 걷다가 도문시교 하가여라는 마을 부근에서 나이 마흔이 되여보이는 한 녀인을 만났다.
그 녀인이 기진맥진한 할머니를 보고 당금 숨이라도 넘어갈 것 같아 부축하여 자기 집에 데려가 가마 안에서 삶은 감자 몇알을 꺼내주었다. 녀인이 이것저것 묻기에 눈물 흘리며 이실직고했더니 그 녀인은 친정집으로 가지 말고 차라리 근처에 마땅한 재혼자리 있으면 그 집에 자리 잡고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 녀인이 이튿날부터 근처 마을에 홀애비가 있는가 수소문했는데 마침 우리 할아버지 숙부 벌 되는 먼 친척이 그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집에 찾아갔다.
우리 할아버지는 본처가 병으로 갑작스레 돌아가는 바람에 아들 둘, 딸 둘 가진 홀애비로 되였기에 후처를 맞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개 받은 과부들마다 할아버지를 만나보고는 아이 넷을 키울 자신이 없다면서 단통 거절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아이 넷이라고 하면 거절당할 것 같아 친척들이 모여 방안을 짰다. 먼저 작은애 둘(일곱살짜리와 네살짜리)을 고개 너머에 있는 할아버지의 삼촌댁에 보내고 새 사람을 맞아들여 두 사람이 정이 든 다음 다시 대책을 대자고 말이다. 할머니는 아이 둘이라는 말에 대뜸 동의하고 할아버지와 같이 한달을 살았다.
할아버지의 숙모가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새댁을 한번도 보지 못해 인사를 가려고 하니 아이 둘이 울면서 따라나섰다. 하는 수 없이 애들을 데리고 떠나면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도 절대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할아버지댁에 이르니 새댁이 앞마당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할아버지 숙모가 먼저 인사하며 자기소개를 하니 새댁이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갑자기 새댁 눈길이 아이들을 떠나지 않으니 할아버지 숙모는 불안해서 친척집 아이들인데 부모들이 일하러 가면서 맡겨 마땅히 둘 데가 없어 이렇게 데리고 왔다고 둘러댔다. 그래도 새댁이 아이 둘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기에 당황해난 할아버지 숙모는 아이들 보고 당장 밖에 나가 놀라고 했다.
그런데 신발을 신고 문을 열던 남자애가 먼데서 아버지가 오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라고 부르며 넘어질듯 막 달려가고 뒤따라 녀자애도 “아버지…”하고 웨치며 달려갔다. 할아버지와 함께 일하러 갔다 오던 큰아이 둘도 두 동생을 보자 마주 달려와 아이 넷은 부둥켜안고 소리 내여 울었다. 할아버지도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아버지 숙모는 할 말을 잃고 새댁 앞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 치고 말았다. 그래도 머리회전이 빨라 울면서 새댁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보게, 새댁, 지금 세월에 애 넷 딸린 홀애비라고 하면 어느 녀자가 들어오자 하겠소? 조카가 재혼을 못할가 봐 우리 친척들이 모여서 아이 없는 한족집에 애 둘을 주라고 핍박했소. 공교롭게 오늘 애 데려간 한족집에서 도문에 일보러 가면서 나한테 맡겼는데 집에 애들 둘만 두기 무서워 이렇게 데리고 왔소.”
“아즈마이, 그러잖아도 친척집 애들이라 하는데 어째 우리 집에 있는 애들과 똑같게 생겼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스꾸마. 애 둘이라 해서 왔는데 또 둘이 불어나면 내 감당이 되겠는가 가슴이 자꾸 두근거리꾸마.”
차려놓은 점심을 대충 먹고 아이들은 언제 울었냐는듯 웃고 떠들며 재미 있게 놀고 있었다. 새댁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설겆이를 하면서 힐끔힐끔 아이들을 훔쳐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겆이를 마친 새댁이 가마목에 앉아 삼촌댁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애 넷은 조롱조롱 모여앉아 초롱초롱한 눈길로 새댁만 쳐다보았다. 한참후, 할아버지 숙모는 가지 않겠다고 아우성치는 아이 둘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저녁, 할아버지는 기를 쓰고 울어대던 두 아이가 눈에 밟혀 도저히 잠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밤중에 할머니가 할아버지보고 일어나 앉으라 하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봅소, 내 할 말이 있스꾸마. 내 나이 어려 잘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집에 들어선 이상 엄마인데 어찌 저 어린것들을 남의 집에 주겠슴둥? 어떻게 한집식구가 생리별하고 갈라져 살겠슴둥? 우리 애 둘 데려오깁소.”
이리하여 생리별할 번했던 사남매가 스물세살밖에 안된 후엄마의 깊은 아량에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되였고 크면서 서로서로 힘을 합쳐 후엄마를 잘 도우며 화목하게 살았다.
사남매가 한집에 모여 사니 열두살짜리 우리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날마다 할머니 뒤를 따라다니며 “어머이, 뭘 하람둥?” 하고 자꾸 물었다. 그러면 스물세살 할머니 얼굴이 빨개서 “그 어머이 소리 안하면 안되겠소?” 하고 되물었다.
“야, 어머이두, 어머인데 어머이라 하지 뭐라구 하겠슴둥? 우리는 새 어머이 너무 좋스꾸마.”
아버지가 벙긋 웃으면 할머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만 했다. 고모들이 온밤 들려준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드라마속 이야기보다 더 곡절적이고 감동적이여서 나는 듣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헌신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원초적인 삶, 아버지가 자식사랑보다 효를 중히 여길 수밖에 없는 리유 그리고 이 땅에 정착하며 겪은 모든 불행을 가슴에 묻어두고 억세게 살아온 웃세대의 이야기를 늦게나마 구체적으로 듣게 되여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고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였다.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가 하늘을 감동시켰는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십년 되는 해에 우리가 살던 마을의 땅이 팔리고 할머니 몫으로 현금이 차례졌다. 우리 손군들은 가족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생전에 손이 발이 되도록 일만 하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저세상에서는 편히 누워 쉬시라고 ‘새집’을 사드리자고 한결같이 의견을 모으고 연길 경도릉원에 묘지를 사서 할머니의 골회함을 정히 모셨다. 지금도 연길에 사는 손군들은 일년에 두번씩 모여 할머니 ‘새집’에 찾아가 제사를 지내고 서로서로 할머니에게 그동안 있은 기쁜 일을 회보하고 하고 싶었던 말들을 다 하며 할머니를 기리고 있다.
나에게는 엄마 같았던 할머니, ‘비행기아매’는 가셨지만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실 것이다!
/최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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