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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맛이 바로 이 술맛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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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0-10-14 22:23 조회8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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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룡 선생님, 그립습니다.

김해룡 선생님은 내가 연변대학을 다닐 때의 담임선생님이시다.

 

선생님께서 올봄에 세상을 뜨셨다.

비보를 뒤늦게 들은 나는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는 선생님이시자 형님같은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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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77기 조문반 "머리 큰" 학생 6명이 학교청사앞에서 김해룡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찍은 기념사진. 앞줄 중간에 앉으신 분이 김해룡 선생님이시다.

개학 첫날 저녁에 선생님께서 날 집에 오라고 하셨다.

 

댁에 도착하니 사모님께서 날 보고 아바이(할아버지)대학생이 왔구만, 하고

농담 섞인 말씀을 하시며 반기셨다.

 

선생님께서는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날 맞았다.

 

구들엔 밥상이 차려졌는데 술잔 두개가 놓여있었다. 난 다소 어안이 벙벙해났다. 시키는 대로 밥상에 앉으니 선생님께서 손수 첫 술잔에 술 따라 주시면서 넌지시 물었다.

 

술, 좀 마시오?

예. 좀 마십니다.

 

나의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허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영철이를 데려와서 흑룡강에 모집하러 갔던 두 선생이 몰려대고 있다오. 술친구를 데려왔다고 하면서.

 

내가 어색한 웃음을 짓자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내가 뽑힌 사연을 들려주셨다.

 

흑룡강에 모집하러 가셨던 두 분께서 성적순서로 남자응시생 5명과 여자응시생 5명을 뽑고 신상등록서를 찾아보셨단다.

 

최영철, 1946년 3월 출생.

 

두 분께서는 머리를 저으며 나이가 너무 많다면서 나의 이름을 지웠단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중앙에서 문화혁명전의 고중졸업생은 나이가 많아도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시험성적이 좋으면 뽑아야 한다. 이렇게 나의 이름은 다시 합격명단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지워졌단다. 학교에 돌아가면 술친구를 데려왔다고 문제시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란다.

 

처사가 찜찜함을 느낀 두 분은 흑룡강신문사를 찾아가 윤응순 사장의 의견을 들었다.

윤사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최영철의 성적이 좋으면 입학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졸업 후 우리가 받겠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가 입학했다고 알려주셨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는 또 나를 집에 초대했다.

술이 몇 잔 돌자 선생님께서는 불쑥 물었다.

 

영철의 수학성적이 왜 높나?

고중 때 수리화공부에 열중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수학학부로 갈 생각이 없나?

 

나는 선생님께서 이처럼 자상히 관심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차, 졸업 후 흑룡강신문사에서 받겠다고 한걸 깜빡했어. 그렇게 되면 좋은 일이지.

 

여름방학에 집으로 돌아 온 나는 가슴 아픈 일을 목격했다.

 

마을에 얼음과자 장사가 왔다.

두 살짜리 작은 아들이 엄마보고 사 달라고 떼를 쓴다. 얼음과자 하나에 3전씩 할 때였다. 아내의 손에는 3전도 없었다. 가슴이 칼로 난도질 하듯 아팠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말했다.

 

가정을 돌보려면 통신학부로 옮겨야겠소. 옮기면 집에서 공부하고 방학에 학교에 가 시험만 보고 성적이 합격되면 같은 졸업장을 탈수 있소. 새 학기부터 통신학부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아내는 다른 의견이 없었고 형님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개학 이틀 전에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가 내 생각을 털어놨다.

 

선생님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 좀 지나 선생님께서는 생각 밖의 말씀을 하셨다.

가정생활이 어려운 것 같은데 내일부터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남은 식비는 집에 보내오.

 

나는 머리가 뗑 해났다. 그리고 인차 도리머리를 저었다.

선생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곤난을 극복하고 견지하겠습니다.

 

눈물에 젖은 나의 얼굴을 보시면서 계속 말씀하셨다.

 

이번 학기 중간부터 나이 많은 학생들은 10일간 집에 가서 가정 일을 도와주오. 갈 때 나한테 알리지 말고 반장한테만 알리면 되오. 내가 반장한테 말할게.

 

선생님께서 농촌사정을 잘 아시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때 마을에서는 모내기와 벼 가을에 정량제를 시행했다. 즉 노력당 임무와 시일을 정하고 그 시일 내에 끝내지 못하면 벌금 도 안긴다. 도와 줄 손이 없는 아내는 모내기철에 새벽에 일터로 나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일하는 아내를 도우라니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가을도움을 끝내고 학급으로 돌아오니 또 반가운 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선생님께서는 한 여학생을 시켜 못들은 각 과목의 강의를 내 필기장에 써 넣도록 하셨다.

 

4년간 선생님의 관심과 동창들의 도움으로 무난히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 후 나는 두 번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1988년 10월에 성직속단위에서 받은 모범일군 표창장을 들고 갔다. 진 붉은 표창장을 보신 선생님의 얼굴엔 반가운 웃음이 떠올랐다.

 

영철이, 참 대단하오.

 

선생님께서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면서 축하해 주셨다. 그때 가슴이 얼마나 뿌듯하던지.

 

1990년 8월에 2차 방문을 했다. 무더위로 선생님께서는 런닝 차림으로 날 맞았다.

 

날씨가 너무 더우니 영철이도 런닝 차림해. 구들에 올라가지 말고 있는 대로 주방에서 상 놓고 먹기오.

 

밥상은 주방바닥에 차려젔다. 나는 들고 간 술병과 안주를 꺼내 밥상에 차려놓았다.

 

53도 술, 참 귀한 술이구만.

 

그날 저녁에 무더위 속에서 낮은 쪽걸상에 쪼그리고 앉아 그 독한 술 한 병 굽을 냈다.

 

그 이듬해에 선생님께서는 답사방문으로 할빈으로 오셨다.

 

그때도 무더운 여름이라 우리 집에서 또 런닝 차림으로 53도 술을 밤늦게까지 마시면서 이야기 주머니를 풀었다.

 

술 3잔을 마신 선생님께서는 불쑥 물으셨다.

 

영철이, 인생 맛이 무슨 맛인지 아오?

 

예?! 무슨 맛입니까?

 

나의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술잔을 들고 대답하셨다.

 

“인생 맛이 바로 이 술 맛이야.” 라고 대답하시면서 또 한잔을 쭉 마셨다. 나도 뒤따라 통쾌하게 한잔을 굽 냈다.

 

우리는 인생 맛을 즐기면서 추억의 호수 속에서 밤늦게까지 헤엄쳤다.

 

그때의 만남이 마지막 상봉일줄 누가 알았으랴.

아~ 가슴이 미어진다.

 

선생님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비보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날 저녁에 나는 선생님께 53도 술 한 잔 부어드렸다.

난 3잔을 마신 후 나직이 기원했다.

 

김해룡 선생님 하늘나라에서 사모님과 함께 편히 쉬십시오.

김해룡 선생님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영철

 

2020년 4월 22일

한국 부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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