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나의 인생좌우명이고 롤 모델이신 존경스러운 시형이 계신다. 시형이라면 거개가 손아래 동생의 아내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존재이다. 나는 시형 앞에서는 언제나 자기의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말과 행동에 신중하며 다소곳하고 자신을 낮추며 내숭을 떠는 편이다. 그만큼 존경스럽고 우상으로 보였기 때문 이였다.
실은 맏아들인 나의 남편한테는 친형님이 안 계신다. 그러니깐 당연히 친 시형은 없었다. 항상 맏아들과 맏며느리로서 가정의 크고 작은 일을 영위해가며 코기러기역을 하다나니 손우형님의 사랑에 목마른 것 같았다. 남들이 든든한 형님이 지켜주는 동생으로서 받는 사랑을 바라볼 때마다 그렇게도 부러웠었다. 나도 이상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조물주는 나의 남편을 맏아들로 점지하였으니깐 무슨 방법이 더 있으랴!
바로 이러던 차에 지금으로부터 세월을 거슬러 거의 40년 전, 어느 날인가 다시 말하면 20세기 80년대 초, 남편한테 난데없는 전화가 왔는데 남편의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뻗어나간 친척 벌 되는 열 살 우인 형님이라는 것 이였다. 그때까지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생면부지였는데 친히 남편의 직장까지 찾아오셨다. 그만큼 정을 중히 여기는 분인 것 같았다. 그때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이때까지 쭉 친형제를 초월한 깊은 정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기나긴 40년 동안의 세월을 보내며 언제 한 번도 얼굴을 붉힌다거나 못마땅한 일로 불만을 가지거나 하는 일이 없었고 넘치는 정으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서로 베풀며 행복하게 지내 왔다.
시형은 다부지고 왜소한 체구 대신 준수하고 단정한 오관에 정기 도는 두 눈에선 언제나 그 무슨 사색의 여운을 남기는 관찰력과 통찰력을 과시하는 듯 했고 민첩한 사유를 가지신 분임을 단번에 보아낼 수 있는 분이시다. 몇 십 년 동안 함께 지내오면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시형은 대바르고 정직한데다 무슨 일이나 열심히 대하시면서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고 완벽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항상 밝고 산천의 오염 한 점 없는 샘물처럼 맑고 맑은 심령을 가지신 분이시다. 금년에 77세인 시형은 여태껏 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이 량심과 도덕에 어긋나지 않게 살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시형은 인품 좋으시고 정이 많은 분이시다. 티끌만치도 누구한테서 덕을 보려하지 않으셨고 항상 더 많이 베풀며 사셨다.
시형은 다섯 살 되던 해에 불쌍하게도 엄마를 여의였다. 조롱조롱 어린 세 아들과 딸을 둔 아버지는 애들을 훗엄마 손에 눈치밥을 먹이지 않으려고 재취하지 않으시고 그 어려운 세월을 혼자서 네 남매를 키우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그때 그곳은 개산툰 부근에 있는 한 농촌마을 이였다.
어릴 적 집안 살림이 구차하여 각반을 주어모아 바지를 해 입은 일도 있었단다. 시형은 겨우겨우 어렵게 학교를 다녔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학급에서 항상 일등을 하셨다. 형님도 그렇게도 총명하여 상급학교에 붙었지만 생활난으로 갈 수 없는 신세였다. 그러던 차에 군대 갈 나이가 되자 시형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하게 되였다.
그때 그 시기는 농촌에서 참군하게 되면 출세한 셈이고 많은 처녀들은 해방군을 흠모하는 그런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시형은 원래 키가 크지 않다보니 총을 메고 배낭을 짊어지고 장거리 행군할 때면 그야말로 어린애 같았단다. 갓 참군하여 어느 한번은 부대에서 야영훈련을 하게 되였는데 동북군대들이 신던‘따투세’를 신고 걷다가 발에 물집이 생겨 도저히 한발작도 내디딜 수 없게 되자 아예 그 신발을 벗어 끈을 해서 목에 걸고는 맨 양말바람으로 아픔을 참아가면서 몇 십리나 되는 눈길을 헤치면서 이를 악물고 견지해나갔단다. 그의 이런 견강한 의지는 전 부대를 감동시켰다. 언제나 완강한 의력으로 열심히 노력한 덕에 비록 작디작은 체구였지만 부대 장병들을 감동시켰고 시형의 사적은 모르는 사람이 없이 전 부대에 널리 퍼졌다. 또한 심양군구로부터 강골전사(硬骨头战士)라는 영예를 수여받았다.
그는 바로 심양군구영웅호담정찰련에 편입되어 기본훈련을 거친 다음 부대에서 손꼽히는 기량을 보였다. 그 날파람 있고 날렵한 동작은 그 어떤 적수도 당할 수 없었다.
한번은 키가 구척이나 되는 적수가 키가 작은 시형을 만만하게 보고 코웃음 치며 맞다들었다가 시형한테 크게 패하고서야 두 손 들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단다. 시형은 겨룰 때 단순히 몸으로가 아니라 머리를 쓰면서 상대방을 전승한다는 것 이였다. 그 뒤 시형은 부대에서 전기인물로 부상되었다. 끈질긴 의력과 총명한 두뇌를 가진 시형은 진보가 아주 빨랐으며 선후하여 반장,패장,부련장,련장,사령부정찰과과장(퇀급)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아무런 인맥도 없는 시형의 이런 직선적 승급은 완전히 자신의 지혜와 피타는 노력의 결실 이였다. 그 후로 시형은 1979년, 윁남자위반격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기간 몸에 부상도 입고 잔폐도 되셨다.
20세기 80년대 초, 시형은 지방에 전업하시여 연길시위 요직에서 사업하시다가
정년퇴직하셨다. 그동안 시형은 수차례 우수당간부의 영예를 받아 안았다.
시형이 부대에서 전업하신 후 윁남자위반격전영웅보고퇀이 연길에 순회 보고하러 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수장 이였던 시형을 모시고 함께하는 시간도 가졌단다. 그리고 어느 한번은 시 기관에서 의무로동하러 갔다가 휴식시간에 키가 구척이나 되는 20대 청년을 불혹의 시형과 대결을 시켰는데 눈 깜작 할 사이에 그 청년을 재꼈단다. 그 일이 있은 뒤로 한동안 시기관에서 시형의‘功夫’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이 전기 인물로 되여 화제에 올랐었단다. 이러한 것들은 시형의 인생에서의 한낮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대에서나 지방에 돌아온 후에도 시형은 추호의 사리사욕도 챙기지 않고 충성스럽고 정직하게 청렴하게 공작하셨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인민의 공복이고 이 시대에 존경하고 찬송할 공신이다. 이면에서는 누가 뭐래도 내가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한 내가 산 증인이다. 그는 언제 한 번 직무의 편리를 도모하여 개인의 득실을 채우는 일이 없었다. 그 시기 말대로 한다면 ‘입안에 들어온 떡’도 먹을 줄 모르는 ‘일등 머저리’라고 할 수 있었다. 시형에게는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이 있었고 어느 정도 자기 안속은 챙길 수 있는 특권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허나 시형은 이런 특권을 언제 한 번도 자기의 안일과 안속을 채우는데 리용하지 않고 투명하고 깨끗하게 공작하시였다. 언제나 광명정대하고 표리가 일치하고 대공무사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사하는 시형은 보기 드문 청렴한 관리일군이시다.
시형께서는 언제한번도 직권을 리용하여 가족의 공작안배를 해준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어 안해의 일자리 안배에도 나서지 않으셨다. 어렸을 적에 학급에서 줄곧 우수생이었고 스무나문 살 될 때부터 대대부녀주임도 한, 남보다 우수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맏동서는 결혼 후 부대로 갔으며 10년 동안 줄곧 부대제약공장에서 관리일군으로 일했다. 남편을 따라 낯설고 물선 고장인 사천에서 고생하다가 다시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돌아왔지만 겨우 대집체단위에서 탁아소 보모를 하다 퇴직하였다. 그러다보니 지금도 퇴직비가 2000여원밖에 안된다. 자기의 특권을 리용하여 얼마든지 관리직에 배치할 수도 있었고 또한 맏동서의 실력은 완전히 감당할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시형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맏동서는 한평생 군인의 안해로서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 남편의 사업에 받침돌이 되어주셨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남편을 리해하고 지지하셨다. 그리고 가정의 크고 작은 중임을 떠메고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는데 헌신하였다. 농촌에 있는 시동생네를 계속 도와주는가 하면 6년 동안이나 아무런 대가도 없이 시조카를 집에 데려다 공부시켜 대학에 보낸 일, 자식농사를 잘 지어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간 일,여하튼 시형의 뒤에는 묵묵히 십오야 보름달 같은 아내가 있었다.
이런 안해를 시형은 또 탁아소보모에서 공인강위로 50대에 퇴직시키고 공원에서 얼음과자 장사를 시켰다. 시형이 유일하게 소위말해 ‘특권’을 리용한 것이라면 공원의 아는 사람을 통하여 공원에서 얼음과자를 파는 자리를 마련한 것뿐이다.
하지만 맏동서는 언제 한 번도 원망의 말 한마디 없이 일편단심 ‘민들레’로 살아왔다. 그야말로 군인 안해의 풍채를 보였다. 남편의 사업도 지지하고 마음이 한결 떳떳하단다. 어느 한번은 남편과 함께 수장이 된, 당년에 부대에서 하급으로 있던 전사의 초청을 받고 사천으로 갔는데 남편을 그렇듯 높이 모시면서 존경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한평생 남편을 따라 남정북전하면서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면서 그래도 이렇게 훌륭하고 존경스런 남편을 만난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와 속심 말을 털어놓기 좋아하는 맏동서는 시형의 청렴하고 정직한 일 처사에 대해 늘 외우군 하였다. 그 시기에는 대소사가 있을 때면 인맥이 많다나니 호주머니도 불룩하게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여서 많은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하지만 시형은 집안의 대소사에 한 번도 많은 사람들을 청하지 않고 조용히 보냈다.
조카딸의 결혼식 때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할 무렵이 되자 시형은 부서의 인원들한테 자기가 한턱 쏘겠다면서 식당에 청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갔단다. 후에야 딸이 결혼하게 되여 이런 형식으로 청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시형은 항상 알리지 않고 조용히 보내군 하셨다. 일이 지난 후에야 소식을 접한 지인들로부터 꾸지람을 듣는 일이 많았었다.
시형은 요직에서 공작하시면서 언제 한 번 사리사욕을 채운 적이 없다보니 항상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시군 한다. 시형은 물질과 금전의 유혹에서 떳떳하지 못하게 사는 것보다 두발을 쭉 펴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말씀하시하군 한다. 시형은 언제나 거리낌 없이 자기의 견해를 대담하게 발표하시군 한단다. 한 정의감이 있는 령도는 시위령도들 가운데서 이렇게 정직하고 청렴하고 대바른 우리시형이 제일 눈에 든다고 하면서 존경의 마음을 털어놓았단다.
이렇게 한평생 청렴한 관리로 사업하신 시형이 퇴직 후, 몇 번 큰 병을 앓을 때나 집 장식을 할 때에 한국에 가서 번 처남의 돈을 돌려쓰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시형의 그 깨끗하고 청렴함에 탄복과 존경을 금치 못한다.
시형은 항상 마음의 부자이시다. “나라에서 나한테 이렇게 높은 월급과 잔폐금, 그리고 퇴직 후에도 여러 면으로 관심해주는데 이것만으로 더없는 만족과 행복인데 뭘 더 바랄 것이 있느냐.”며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이것이 정말 참되고 보람 있는 인생이라고 경탄하게 된다.
시형은 공작터에서는 항상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원칙 앞에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고 조금도 선을 어기는 일이 없으셨지만 넉넉한 인품과 수양을 가지시고 항상 힘든 사람들을 도와 나서고 남을 배려하시는 정이 많으신 분이시다. 친척지간에도 그 사람이 약자라 할지라도 항상 평등하게 대해주고 정을 나누면서 보낸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서 꼬물만치도 덕을 보려는 생각이 없으시고 항상 남한테 베풀면서 살아간다. 퍽 어린 동생들이나 조카들이 이상분의 생일파티에 참가하면 아무리 공작이 다망해도 잊을세라 달력에다 메모해 놓고는 꼭꼭 챙겨 주시군 한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힘이 되여 주군 한다. 한평생 기술공작에 종사해오고 관직에 대한 개념이 그다지 없는 나로서는 시형네와 40여년 동안 래왕하며 시형의 관직 때문이 아니라 그 정직하고 선량한 인간됨과 인품에 끌려 존중과 정 때문에 함께해 온 인생인 것 같다.
어느 해인가 내가 몹시 아파서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할 때, 시형과 맏동서는 항상 근심해주고 챙겨주면서 하루빨리 일어나도록 힘이 되어주셨다. 그리고 남편이 아플 때에도 노심초사하시고 한 번도 그저 지나갈 때 없이 챙겨주시고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주시군 했다. 지어 우리들이 먼 곳으로 여행 떠나거나 북경에 있는 딸집에 손녀를 보러가거나 돌아올 때에도 맛있는 음식을 갖춰놓고 배웅도 하고 맞이해 주셨다.
일찍 양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사랑에 목마른 나는 이글을 쓰면서도 그 사랑에 목이 메고 가슴이 뭉클해 난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관심해주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비록 시형이지만 나는 부모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형을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형은 생활상에서도 매우 엄격하시고 정직한 분이시다. 평시에는 물론 술을 드셨을 때에도 한번도 말과 행동이 흐트러질 때가 없이 늘 점잖으시다. 한평생 정직하고 대바르고 정이 많게 살아온 나여서 그런지 이런 시형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난다. 40여년의 생애에서 이런 분과 세상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고 시형이 더욱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인다. 이것이 나의 인복이라고 생각한다.
시형은 이시대의 사회발전과 정신문명건설에서 높이 찬양해야할 본보기이시다. 이런 분이 많을수록 우리사회는 발전할 수 있고 화목한 세상으로 살맛날 것이다.
나는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다는 40여 년 동안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아니 뼛속으로부터 시종일관 시형을 존경해왔고 내 인생의 롤 모델로 삼고 오늘까지 동반해왔다. 77세 고령의 시형은 비록 중병으로 고생하고 계시지만 항상 책과 친구하시고 병마와 싸우시면서 우리들과 이 세상을 함께하고 있다.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앉으세요! 나의 롤 모델이신 시형님!
/최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