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거실중간 소파 안자리에 누워서 하늘나라로 가신 아빠의 따뜻한 온기를 되찾으려 애쓴다. 항시 우리에게 따뜻하고 상냥하고 인자하신 아빠의 숨소리를 새삼스레 떠올리면서 지나온 세월 태산 같은 아빠의 사랑과 관심에 마음은 어느덧 그리움으로 꽉 차있다.
1962년 나라 하방정책으로 할빈병기공장에서 설계사로 근무하던 아빠는 자식들을 조선족이 집거한 연변에서 키워보려는 욕심으로 좋은 일터를 그만두고 여기 안도 중평촌으로 하방하여 농촌에 뿌리박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아빠는 농민이라는 간고한 직업을 택하게 되였으며 얼마 안 되여 큰딸인 내가 태어났고 뒤이어 남동생 두 명이 태어났다. 우리 삼형제는 아빠, 엄마의 품속에서 조선말을 배워가면서 행복하게 즐겁게 자랐다. 아빠는 우리 3남매 중에서도 나를 제일 예뻐한 것 같다. 해마다 가을에 공량 바치러 공사마을 갈 때면 늘 나를 공량수레 앞자리에 앉혀가서는 “개눈깔”사탕도 사주고 고무신도 사주었다. 어린 나이지만 나는 아빠와 함께 다니는 것이 왜 그리도 자랑스럽고 즐겁고 행복하고 좋았던지...
그 후 아빠는 공사사방기업 회계 및 정부 수리소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출장 다니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출장 갔다 돌아올 때면 항시 나의 선물을 잊지 않고 사왔다. 하여 나에게는 여자애들이 부러워하는 머리댕기가 가지각색으로 수없이 많았다.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아빠가 내 인생의 최고였으며 아빠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아빠의 존재는 나에게 하나의 큰 산이었으며 넓은 바다였다. 그러는 아빠에게 나는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었다.
아빠는 본래 술을 아주 반가워했다. 나는 아빠의 술안주를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서 하학후면 애들이 모여 줄넘기를 놀고 숨바꼭질을 놀아도 놀지 않고 그 시간에 강변으로 달려가 가재잡이와 개구리잡이를 해서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맛있는 술안주를 해주었다. 그리고 초봄 싸늘한 봄바람이 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끝을 불어가면서 묵은 덤불을 헤치고 채 녹지 않은 언 땅을 뚜져서 봄달래를 캤다. 그러면서 혹시 큰 달래가 나오면 아빠가 큰 달래를 쥐고 즐겁게 드실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절로 웃음을 지어보기도 했다. 왜냐하면 아빠는 내가 조그마한 일을 해도 항상 ‘우리 딸이 최고야, 우리 딸이 한 반찬이 제일 맛있구나’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칭찬과 사랑에 나는 무지무지한 행복한 느끼면서 또 내일도 아빠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지하고 다짐하였으니깐...
아빠는 나에게 더 없는 사랑과 관심을 주면서도 인성교양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하고 직설적인 분 이였다. 한번은 내가 과일을 먹고 싶어서 친구들과 같이 과수원에 돌배 도적질을 갔다. 늦은 밤 한 가방 돌배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빠한테 발각 되였다. 아빠는 그 즉시로 주인한테 돌려주게 하고 나를 엄격하게 꾸짖으면서 다른 사람의 물건에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엄격하게 타일렀다. 그때는 과일이 귀한 때라 과수원 개를 피해가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뜯어온 돌배가 아까웠지만 아빠의 가르침으로 하여 비록 배는 먹지 못했지만 새로운 인생도리를 알게 되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빠는 우리 학교 초빙수업을 맡게 되였는데 수학에서 측량부분을 항상 아빠가 강의하였다. 실외수업이라 상냥하고 차근차근 위치측량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아빠 덕분에 학생들은 모두 즐겁게 시간을 보았다. 지금도 우리 동창들은 아빠를 많이 외우면서 당시에 강의에 대해 극찬하고 있다. 매번 내가 수학과 한어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아빠는 나의 훌륭한 과외선생님으로 되여 하나하나 바쁜 문제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중등전문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빠는 태질이 심한 딸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가봐 직접 학교에 와서 침대 옆에 널판자 하나를 더 껴 얹어 놓아주면서 밤에는 벽 쪽으로 붙어서 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항상 곁에서 관심하고 돌봐주던 딸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니 아마 여러모로 근심이 태산인 것 같았다.
내가 2년 동안 외지 생활하는 동안 아빠는 연길에 오실 때마다 엄마가 해준 맛나는 음식을 가득 가지고 와서 한 침실 친구들과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침실친구들은 아빠를 몹시 기다렸고 또 아빠가 오면 모두 열정적으로 대했다.
아빠는 생활상에서 나의 든든한 지원자였으며 정신상에서 나의 훌륭한 계몽선생이었으며 사업상에서는 깐깐하고 세심한 재정업무의 선배였다.
내가 공소사에 배치 받아 회계공작을 할 때 아빠는 오랜 재정업무의 실력자로서 나를 계도계산, 연말계산 순서를 차근차근 가르쳐주었으며 더욱이 1985년 농촌정당 때에는 당내 분쟁에서 예비당원인 내가 서야할 입장에 대해 잘 가르쳐주시고 당전 정치형세를 투철하게 파악하고 정당이 그 무슨 한 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이 아님을 잘 인식하게 함으로써 당시 치열하게 진행된 농촌정당에서 내가 초심을 잃지 않고 주관회계라는 중대한 직책에서 맡은바 작용을 충분히 잘 발휘하게끔 이끌어주었다.
그야말로 아빠는 나의 성장과정에서 등대와 같은 존재로 나의 앞길을 밝혀주고 인도해주고 키워주신 훌륭하고 고마운 분이었다.
지금 내 나이 50후반이지만 지금도 아빠의 진심으로 되는 가르침과 지도가 많이 그립고 그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진다.
아빠는 나의 영원한 맨토이다!
/경기도 수원 남인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