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에 모친을 따라서 산에 자주 다니던 기억이 있다. 봄 산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었고 흰색, 남색 도라지 꽃이 망울을 터치고 달래, 민들레가 파랗게 자라났다. 나와 모친은 산나물과 들나물을 캐서 집 식구들의 밥상에 올렸다.
가을에는 또 겨울나이 땔나무하러 다녔다.
가을산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울긋불긋 단풍이든 칠색의 나무 잎,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 온갖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어우러져 골짜기는 신화 세계처럼 아름답다. 찌르륵 찌르륵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가 절기를 재촉한다.
부모님들은 황홀한 자연의 경치를 흔상할 겨를도 없이 산 언덕에서 여름 내내 해볓에 바싹 마른 나무 가지들을 낫으로 긁어 모은다. 나는 여기 저기 뛰어다니면서 까마중도 뜯고 산중턱에서 고운 얼굴을 자랑하는 빠알간 가시나무 열매를 따느라고 손을 가시나무 덩쿨 속에 냉큼 집어 넣기도 한다. 주의하느라고 했는데도 요모조모에 숨어있던 가시가 내 조그마한 손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니깐 나로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아파서 징징 거리는 어린 딸이 안쓰러워서 모친은 동집게로 내 여린 손에서 가시를 하나하나 끄집어 내였다. 가시 하나를 뽑아낼 때마다 엄마의 가슴에서 피 한 방울씩 떨어졌고 내 눈에는 눈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도 아팠고 엄마도 아팠다. 엄마는 속으로 울었고 나는 겉으로 울었다.
손에 찔린 가시는 뽑아낸 다음 시일이 지나면 아물어 버리고 상채기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찔린 가시와 가슴에 박힌 못은 심신을 엄중하게 좀먹게 한다.
가슴 깊이에 자리 잡았던 보이지 않는 상처가 씻은 듯이 나을 수 있을 런지? 어차피 인간세상을 등지고 떠나가기 전에 마음 한쪽 켠에 도사리고 앉았던 가시들을 적출하고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채우고 내면 세계를 깨끗하게 정화하고 홀가분하게 떠나야 할 것이다. 배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시, 질투라는 병이 깃든 가시, 잘난체하는 못난 가시들이 뾰족뾰족한 송곳처럼 내 가슴에 빼곡빼곡 촘촘하게 들어 앉았다. 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속살이 찔리면서 나를 괴롭힌다. 쓰리고 피멍이 진다. 피멍이 진 자리는 새살이 돋아나도록 방법을 대야했다. 고약을 바르면 어떨까? 상처에 붙이는 밴드를 붙여 놓으면 좋을지? 아니 차라리 예리한 면도칼을 쥐고서 란도질을 하여 단번에 요정내고 싶다. 단기적인 아픔이 장기적인 아픔보다 마음의 상처를 줄일 수 있으니깐. 하지만 그렇게는 못한다. 그렇게 막 나가다간 역효과를 불러온다. 가시도 못 뽑고 오히려 뿌리만 흔들려서 며칠이 지나면 상처가 곪고 피고름이 흐를 것이다. 진득진득한 오물이 내 심장에 들어 붙어서 심장마비를 일으킬 것이니 안 될 일이다.
깊이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나는 차라리 용서, 정직, 믿음, 포옹, 동정, 사랑이라는 고맙고 정이 넘치는 애들이 가시와 못과 함께 어울려서 감화를 이끌어 오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 호상 어루 쓸고 마음의 보따리를 풀고 단합을 가져오도록 인도 하였다.
상처가 깨끗이 나아지고 가시가 없어지기 까지는 한두날이 아닌 기나긴 시간이 소요된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가슴 아픈 충고도 들려온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명언이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리지’라는 두 글자로 ‘충동’이라는 아이를 억제 시켜놓고 점잖게 기다리겠다.
세월이가고 지구가 돌고 도노라면 나를 업신여기고 나를 질투하고 내 마음에 가시로 남았던 사람들이 나를 리해하고 나에게 한 떨기 아름다운 국화꽃이라도 쥐여 줄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믿음이 너그러움이고 너그러움이 길을 열어준다.
마음의 가시와 못은 뭐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내가 가시라고 생각하면 가시고 내가마음에 박힌 못이라면 못이고 여느 사람들의 사유방식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가시라고 점을 찍어 놓은 그 가시가 수시로 나를 찌를 수 없도록 방비하고 대책을 대여야하는 것이다. 방비가 없는 상태에서 찔리고 나서는 안 아픈 척 군자인척 수양이 있는 척하면 오히려 내 열근성이고 내 비애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가시에 찔린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는 마음속에 가시가 비집고 자리 잡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것이 상책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정직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행복하다. 내 마음이 그러니 남의 마음도 그렇겠지 하는 어리석음, 인간의 마음이 조석으로 변하고 무함을 일삼는 앙큼함을 깨우치지 못한 내가 바보다. 또 뒤늦게나마 깨달았으니 천만 다행이라 하겠다. 일방적인 깨달음과 민심의 깨달음은 어느 때까지나 지속될 런지 답답하다.
수선 나 자신이 나를 용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큰 적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나무랄 일도 아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어쩌면 내 자신의 처사가 다른 사람에게 융합되지 못하고 너무도 톡톡 튀는 독특한 그 성격이 오히려 외인에게 바보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사랑스럽고 착한 바보가 되였어야 하는데 머리에 뿔난 바보가 되여 가지고 자기 삶을 자기절로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시가 되지 말고 서로에게 빛이 되는 등불이 되여야 한다. 이제라도 누구에게 밝은 별빛이 된다면 만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