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유룡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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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4-19 23:25 조회287회 댓글0건본문
오늘은 나의 아버지 94세 되는 생일날입니다.
비상시기이다보니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전화로 문안 했는데 고령으로 인해 잘 듣지 못하는 아버지께서는 이 딸이 보고 싶다며 노래 한곡 부르랍니다. 매년 생일 때면 부르는 노래 “어머니 노래는 많고 많아도 아버지 노래는 없었답니다”를 불러드렸습니다. 부르고나니 어쩐지 오늘따라 가슴이 먹먹해 났습니다. 아, 아버지 나의 아버지, 오늘처럼 특수인기 있는 아버지는 아니고 말수가 적고 로실해 보였으며 자랑스러워 보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연변 룡정시 동성향 인화촌에서 6남매 큰 아들로 태여 났는데 극빈한 생활난으로 인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습하여 연변대학물리계 2기생으로 입하였습니다. 학급에서 반장으로 당선되였는데 나이 많고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고 해서 늘 ‘마다바이반장’ 이라고 불리며 놀림까지 당했답니다.
룡정고중을 1년만 다니고 가난하여 돈이 없어 중퇴하고 대부분 자습하여 대학까지 입학한 아버지께서는 물 만난 고기처럼 너무나 배울 것이 많아 휴식 없이 물리와 수학공부를 했는데 수학에서 너무도 천재적 기능을 발휘하여 수학경연에서 물리계학생이 수학계학생들보다 더 잘 해서 졸업할 때 장춘시 교육국에서 저의 아버지를 지명하여 데려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장춘은 한족이 많아서 큰 아들이여서 보낼 수 없다며 연변1고중에 가기로 했는데 그 당시 훈춘4고중에 교원이 많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여 낯설고 물선 훈춘4고중에 임직하였습니다.
훈춘4고중은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기억을 남겼습니다. 왜냐하면 갓 대학문을 나온 아버지에게는 리상 이였고 노력 이였으며 분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리계의 학생이 수학선생님 겸 졸업반 담임까지 맡아 했는데 이때로부터 아버지는 학급학생들 성적을 높이기 위해 밤이면 고중과 대학수학, 물리 참고서적들을 탐독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한 결과 전국 대학통일시험에서 아버지가 가르친 주용덕 학생이 전국에서 유일한 물리 만점, 수학97점의 높은 성적을 따내 주은래총리께서 입학통지서에 서명했다고 합니다. 1958년 우수한 성적으로 북경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주용덕 학생은 좋은 성적을 계속 보장한 결과 중국과학원 반도체 연구소에서 사업한다고 합니다.
제가 소학교 1학년 때 기억인데 삼각박사로 불리는 아버지가 수학이 특수하여 매 년마다 북경에 가서 전국대학시험 삼각부분의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겼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온 집식구들의 환영 속에서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이 선물들은 대부분 주용덕학생이 보내 온 것이였습니다. 선물마다에는 북경역의 도안이 찍혀있었는데 장화, 비옷 ,필통이 소학생에게는 너무나 희한했고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것이여서 어린 나에게 장화를 신고 비옷을 입기 위해서 매일 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고 귀여운 동년 시절이었습니다. 주용덕학생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한 리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주용생은 두 부모를 여의고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누나와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그에게 아버지는 공부는 물론 생활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답니다.
주용덕학생이 제일 잊지 못해 하는 것은 대학입학지원서를 쓰는 문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에 지망하라고 하였는데 주용덕학생은 희망이 없다며 연변대학에 지망을 썼습니다. 이대 아버지는 주영덕학생 모르게 1지망은 북경대학에 2지망은 청화대학에 썼다고 합니다. 결과 북경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술 을 좀 드시면 이 이야기를 하군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학급에는 리창호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두 부모가 계시지 않았는데 11 명식구가 있는 외가 집에 얹혀 살다보니 생활난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가끔 외가집으로 가는 차비 2원 8전도 없어 걸어가야 하는데 신발마저 변변히 못 신은 것을 아신 아버지는 차비도 대여주고 신발도 사 주셨답니다.
그때 우리 집은 아버지 월급 16원에서 할아버지네를 6원 드리고 아버지 2원으로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8원에서 아버지 술값을 빼고 나머지 돈으로 어머니가 집살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모자라서 양식가공공장에 가서 벼겨를 다듬어 싸래기 뽑아 밥을 짓고 석탄을 사지 않고 겨로 불을 지피는데 몇 번이나 아궁에서 불이 확 나와 어머니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타버리는 위험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옷과 신발을 사주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도움 하에서 리창호 학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길림대학을 졸업하고 중국기계공업부 제5설계연구원 고급공정사로 유명한 설계사를 지내고 있으며 천진시 정협상무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퇴직 후에는 일본독자기업 삼영리베이터유한회사 총경리 등 직무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리창호 학생은 국내외 많은 직무를 맡은 와중에도 몇 차례 찾아 뵙고 큰 명절과 생신에 꼭꼭 전화를 하여 문안을 합니다.
박종걸 학생은 리창호 학생과 함께 대학을 졸업하고 천진에서 함께 사업하다가 훈춘에 와서 훈춘시 정협주석을 맡은 후 아버지를 뵙고 또 우리 집이 작은데서 3대가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교육국에 제기하여 널찍한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종화 학생은 동북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동방국제 공무유한회사총 경리, 동방중전전동방중전무역유한공사 총경리를 력임하였습니다. 중국공산당창건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기념메달을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박종걸 학생은 길림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제4기기계 0업무18연구소 고급공정사 공업전선 설계제조전문가로 발탁되였습니다. 중국 첫 “동방홍 1호” 위성을 발사하여 ‘동방홍’을 듣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도와준 학생들을 일일이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어릴 때의 편견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위대한 업적을 쌓은 우리아버지. 오늘 따라 더욱 우러러 보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유미화 청도에서 2022넌 3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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