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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의 해님은 진종일 대지를 시루가마처럼 달구어놓고서도 무슨 미련이 있다는 듯 서산마루에서 그냥 서성대고 있다.
가게주인 아줌마하고 아프다는 핑게로 여느 때보다 좀 일찍이 퇴근한 산월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진한 화장을 하고는 택시에 올랐다. 그녀는 지금 '유머남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산월이는 그 남자를 어느 카페에서 알게 되였다. 그녀의 글에 늘 댓글을 달아주는 <<유머남자>>다. 그래서 늘 고마움을 느껴왔고 또 댓글도 너무나 유모아적이여서 그녀는 만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에 대한 그 어떤 신비감에 젖어보기도 했다. (아니 내가 왜 이래?) 그녀는 자신을 책망하였지만 그럴수록 '유머남자'에 대한 환상과 신비감이 여름을 맞는 수풀처럼 더 일어섰다.
그러다가 그 어느 날에는 서로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는 사이가 되였고 또 어느 날에는 그 남자가 자기보다 많이 이상이란 것도 알게 되였고 또 어느 날에는 만나자는 약속까지 하게 되였다. 나이가 많다지만 그녀의 머릿속의 <<유머남자>>는 늘 싱싱한 타입이고 센스가 빠른 타입 이였다.
'련인'식당 앞에서 웬 남자가 사부작사부작 걸음을 바장이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 '유머남자'란걸 그녀는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비록 륙십대 중반에 이르렀다지만 그렇게 나이 지긋해 보이지 않았다. 오십대 중반에 이른 자기 남편에 비하면 오히려 생기가 더 있어보였고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체구는 좀 강마른 편이지만 두 눈에서는 정기가 돌고 있었다.
그들은 인차 식당에 자리를 했다. 조금 후에 상우에 맛깔스런 안주들이 연속 올라왔다. 그녀는 처음에는 어색한 기분으로 술잔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그 남자의 권고에 못 이겨 연속 몇 잔 마셨다. 초면이라 그들은 서로 조심조심 대화를 나누다가 산월이의 핸드폰이 울리면서 남편이 빨리 오라는 재촉이 있어서야 일어서게 되였다.
그녀가 금방 식당 문을 나서서 택시를 세우자 그 남자가 택시비를 치르라며 돈을 가방 안에 억지로 넣어주는 것 이였다. 차안에서 그 돈을 꺼내보던 그녀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백 원짜리 다섯 장이였다. 그녀는 속으로 이 돈을 절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대개 금전으로 여자의 마음 움직인다지 않는가?
며칠 후 '유머남자'가 또 그녀보고 식사하자고 했다. 그녀는 '유모남자'가 나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좀 꺼림직 하기도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마음이 달려가고 있었다.
술상은 산해진미였다. 그녀가 종래도 못 보았던 요리들이 가득 있었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같이 차렸을까? 아, 정말 저 남자가 십년 전에 미국에 가서 5년간 일하다가 돌아왔다 했지? 그럼 백만 원 쯤이야 있을거니까. 그녀의 눈길이 저도 몰래 그 남자의 몸에 가닿았다. 죽 벗겨진 이마. 품위 있는 콧대. 상냥한 미소가 가실 줄 모르는 입술. 젊었을 때는 아마도 남아다운 용모였을 거다. 한때는 여자들의 가슴을 많이 울렁이게 했을거다. 그녀는 이렇게 속으로 저울질했다
끝나서 헤어질 때 그녀는 그날 받았던 돈을 되돌리려 했다. 그러자 '유머남자'가 성난 어조로 말하는 것 이였다.
“내 자손심이 뭐가 되라고 이래? 참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러지 말고 살림에 보태 쓰라구. 그래 남녀사이에 돈거래 있으면 꼭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야? 참 짧은 생각이군.”
이렇게 말을 마친 그 남자가 택시를 불러 세우고는 차비를 하라면서 또 돈을 쥐어주는 것 이였다. 돈이 대체 얼마인지 알고 싶은 그녀는 차에 앉자마자 돈을 헤 보았다. 또 백 원짜리 다섯 장이였다. 이 돈은 시장에서 남의 가게를 봐주는 그녀에게 있어서 반달월급에 가까운 돈 이였다. 그녀는 가슴이 자꾸 콩닥대며 세차게 뛰기만 했다.
이튿날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는 인차 ‘고민상담방’에 들어갔다.
"상담선생님. 한 가지 도움을 받으려합니다. 한 남자와 저는 카페친구인데 어제저녁까지 두 번째 만남 이였는데 저에게 돈 천원이나 주더군요. 이 남자의 목적이 무엇일가요? 초면의 여자한테 돈을 주는 남자의 심리는 대체 어떨까요? 좀 알려주세요.”
“오 그래요? 저의 천박한 견해라면 그 남자가 여사한테 호감이 생겨도 단단히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들이란 일반적으로 호감이 있는 여자 앞에서 사내다운 자세를 보이려함도 있고 또한 금전을 아끼지 않기 마련입니다. 여사님은 아마도 미인인가 봐요.”
“이유 없이 남의 돈 가지면 안되지요. 어떻게 되돌려 드려야하겠는데요”
“그런데 그 남자가 받을 것 같아요? 저라도 특별한 의미로 준 돈을 되돌린다 해도 안 받지요. 아무튼 냉정히 생각하면서 잘 처사하세요.”
그로부터 며칠 후의 어느 날, 그녀는 그 ‘유머남자’를 식당에 초청했다. 결산은 물론 자기가 하려했다. 그러면 ‘유머남자’의 ‘빚’도 갚을 겸 또 수수께끼도 풀 겸 해서였다. 그들은 인젠 세 번째 만남이라 전에 비해 몸가짐이나 언어가 퍽 자유스러워 졌다.
“십년 전에 미국에 가셨단게 정말이세요?” 그녀는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구말구. 십년 전에 미국에 갔다가 원래는 더 체류하려했는데 마누라가 중풍에 걸렸다 해서 돌아왔소. 지금 마누라가 살아있어도 산송장이나 다름없거든. 거기에다 나는 고혈압에다 심장병까지 있어서… 참 우리 둘은 늘 앓음 자랑만 해야 하니까 거기에다 친자식도 없는 처지구. 이전에 수양한 딸이 하나 있는데 키워줘도 지금 모른 체하니 내 팔자두 왜 이렇게 기구한지. 글쎄 마누라나 건강이 좋으면 좋겠건만. 돈은 글쎄 백만 원 있다고 하지만 천륜지락을 못 누리니 무슨 소용이 있나”
“아 그렇군요. 정말 여태껏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그날 저녁 그녀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문가에 와서 기웃대는 달빛을 보노라니 저도 몰래 자신의 힘겨웠던 생활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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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원래 농촌에서 농사일하다가 아들애가 고중에 다니면서부터 이 시내로 들어왔었다. 그런 후 식당일도 해보았고 가사도우미, 장사도 해보았다. 아무리 일해도 눈앞의 불을 겨우 끌 정도였을 뿐 호강함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녀도 한때는 다른 여자들처럼 출국 열에 들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였다. 그러다가 한마을에서 살다가 함께 이 도시로 온 금란이를 알게 된 후부터 출국을 포기하고 말았다.
금란이가 러시아로 간 남편이 종무소식이자 애인을 두고 있는데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셋이란다. 정말 두 눈이 뒤집혀질 일이다. 금란이는 매일이다시피 식당에 드나들고 옷도 여간 고급스럽지 않았다. 사실 금란이는 여자다운 데가 없었다. 군대 말처럼 몸집이 웅장하고 얼굴은 광대뼈가 살아나고… 그래서 늘 콤플렉스로 살아온 금란이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남자의 혼을 다 빼앗아냈는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처음에 산월이는 금란이의 불륜에 대해서 이마를 찌푸렸고 도리머리도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란이와 접촉이 잦게 되면서부터 금란이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부러워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때론 질투까지 날 정도였다. (남자들 다 눈에 곰팡이가 끼였나? 하필이면 저같은 여자를…)
금란이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무능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친구 옥자의 계발에 머리가 한결 트는 것 같았다.
옥자는 돈 많이 벌겠다고 한국에 갔었는데 글쎄 한 달 만에 돌아올 줄이야! 뭐 식당에 가서 일했는데 너무도 힘겹더란다. 사발을 씻다가 잠간 화장실로 갔다와보니 사발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더란다. 그런데도 보스는 행동이 늦다고 야단하더란다. 그래서 더는 배겨내지 못하고 돌아왔단다.
“난 굶어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안 갈 테야.”
옥자의 맹세나 다름없는 말에 산월이가 말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다 이겨내더구나. 넌 아직 신체가 좋고 이악스럽기도 한데 그걸 못 이기다니? 나도 가기는 한번 갔다 와야 아들애라도 장가보내지”
“너 시내에 와서 산지도 여러 해되는데 아직 머리가 개발되지 않았구나. 너 같은 인물에 애인하나만 잘 만나면… 무슨 뜻인지 알았지? 너 금란이만 봐라. 얼마나 제 노릇 잘하는가? 넌 어찌 보면 바보스러워!”
옥자의 말뜻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옥자의 말대로 그녀는 아직까지 매력이 있었다. 비록 오십대 문턱을 넘었지만 그러나 그제 날의 말쑥한 피부를 간직하고 있었고 쌍 겹 진 눈이 조금은 내리 처 졌지만 그래도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넉넉했다. 그리고 정갈하게 틀어 올린 머리, 조화를 잘 이룬 오관…
한국에 가면 정말 고된 일에 부대껴야 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몇 년간 일해서 돈은 벌어왔지만 병 얻어오고 또 늙기는 얼마나 늙은 모습 이였던지!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각각인데 너는 저렇게 나는 이렇게…
(그래 난 정말 바보야. 한국에 안 가도 호강하게 살 수 있는데 내 머리는 왜 그쪽으로 트지 못했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왜서 꼭 힘들게 살다가 가야 한담? 현명하게는 못 살아도 똑똑하게는 살아야지)
그녀는 무슨 장엄한 결단이라도 한 듯 입술을 오므렸다.
어느 날 <<유머남자>>가 전화했다.
“산월이 잠간 만날 일이 있는데 전번 식당에 나와 주겠어?”
“그러잖아도 제가 뵙자던 참인데요.”
“아 그래? 그럼 잘 되었군”
조금 후 둘은 어느 식당에서 자리를 같이 했다. 검은색 양복이 그 남자의 인기를 한결 높혀 주었다.
“전번에 돈을 두 번이나 받고 보니 마음이 어찌도 불안한지요.”
그녀의 첫 마디였다.
“그 돈 때문에 신경 많이 쓴 것 같구려. 그까짓 거 뭐. 내가 곤난한 사람 돕는 셈 치면 되잖아? 그리고 산월이와 가깝게 보내고 싶어지는 걸 어쩌지? 이 돈으로 가정살림에 보태오.”
말을 마친 뒤 또 돈을 천원 됨직하게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팔락대는 돈이 손에 닿자 그녀는 왠지 싫지 않았다. 그래서 못 이기는척하며 받았다.
그날 저녁 그녀는 실면하고 말았다. 머릿속은 어지러운 선들로 꽉 차있었다. 달과 별들이 외면해버린 어두운 방안에는 오직 남편의 코고는 소리뿐이다.
그녀는 오래 동안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며칠 후 그녀는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여보세요. 지금 우리한테 한 가지 살길이 나졌는데 당신이 저와 잘 합작해 볼래요?”
“?”
“사실은 우리 먼저 가짜로 이혼하면 되지요. 그런 후 다시 회복하면 된답니다.”
“뭐? 한국에 시집가려고? 절대 안 되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가짜가 진짜로 되었소?“
“아니에요. 바로 이 시내에서 가짜시집을 간다는 거예요. 어느 장소에서 우연하게 만난 남자인데 돈이 대단히 많대요. 그 사람의 마누라가 오늘일가 내일일가 한다는데…인제 그 부인이 사망하면 숱한 여자들이 줄을 서게 될거니 먼저 손을 써야지요. 지금 그 사람이 나한테 신경을 쓰고 있으니 호박이 넝쿨 채로 굴러온대요. 당신은 몇 년 만 고생해요. 그 남자도 큰 병이 있는데 오래 못살거니 죽으면 모든 것 우리거래요. 호-그때면 우린 대부자가 될거에요”
그녀는 우리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주었다.
“하. 당신도 마음이 고약하군. 아무리 못살아도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소? 그래 재산을 위해 그런 수단을 쓴단 말이요? 너무 환상에 빠지지 말고 우리대로 살아 가기오.”
“당신도 정말 답답하군요. 우리가 지금 오십에 들어섰지만 살림이 이게 뭔가요? 모두가 아파트에 사는 세월인데 우린 아직도 단층집에서 사는 게 남들 기에 낯을 못 쳐들겠어요. 인제 아들은 어떻게 장가보내요? 한국에 가서 일할 처지도 못 되고. 그러니 이런 방법이라도 안 쓰면 그래 살아갈만해요? 난 이미 마음을 먹었으니까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요.”
아내가 고집을 세울 라면 누구도 당해내지 못하는지라 남편은 더 말치 않았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두 눈에 피발이 가득 섰다. 하루 밤새에 두 눈이 푹 꺼져 들어갔는데 마치 황야의 실개천마냥 말라들었다. 그런 모양의 남편을 본 산월이의 마음은 음울한 바깥 날씨처럼 무거웠다. (아, 내가 돈에 환장했구나. 돈이 뭐 길래 내가 이 못난이처럼 놀아? 아…난)
그녀는 저도 몰래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왕 마음먹은 일이라 돌아서고 싶지 않았다.
/ 박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