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26살의 한창나이에 미래에 대한 무한한 희망과 기대로 벅차있을 갑자기 연변병원으로부터 "사망통지서"---방광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본성이 쾌활하고 낙관적이고 애호가 광범하던 나에게 생벼락이 들이 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때로부터 나는 운명과 도전하기 시작했다. 천진공안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나날에 육체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새까만 머리가 몽땅 빠지고 체중도 30킬로 그람으로 줄어 병원의 의사들은 여러 차례 병증위험 통지서를 발부해 가정에선 할 수없이 후사를 준비하였다.
병원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묵묵히 병마와 싸우면서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손풍금으로 예술학교 시험을 치는 어린이들에게 악리와 연주기교를 열심히 배워 주었다. 아이들이 전업시험에 통과 되여 학교로 갈 때면 나의 마음은 흥분되면서 자기도 쓸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해는 정성들여 나를 간호하다보니 얼굴이 점점 수척해 갔다. 이런 안해를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안해를 글로 써서 안해에게 보답하겠다는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나의 안해>>라는 문장을 써서 동북3성 간행물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퇴고통지서를 받았다. 편집부에서 수개의견을 써서 보내면 거기에다 몇 글자를 보태서는 다시 보내면 퇴고되군 하였는데 이렇게 원고가 스물일곱번이나 퇴고통지서를 받았다. 흑룡강, 료녕, 연변 길림 등지의 신문매체의 편집일군들은 리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하루 네개 신문매체의 편집일군들은 서로 연락해 끝내 묘령까지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집에 들어서니 병상에 누워 있는 나와 곁에서 병시중을 드는 안해를 보고 모든 것을 알게 되였다. 며칠이 지난 후 나와 나의 안해의 사적이 동북3성 신문잡지에 발표되였다.
반년이 지나 나의 신체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자 나는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남들이 귀신처럼 변해버린 나의 몰을 보고 놀라버릴 가봐 매일 날이 밝기 전에 도시락을 가지고 집과 멀지 않은 산에 올라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간단한 운동을 하였다. 나의 신체가 점차 회복되자 나는 자기에게 새로운 목표--- 신변의 본보기를 글로 써 보려고 맹세했다.
1985년, 다시 사업 터로 돌아온 나는 일요일과 밤 시간을 이용해 원고를 썼다.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편집들은 나의 원고를 잘 편집해 신문매체에 발표했고 나의 문장은 점차 신문잡지에서 볕을 보게 되였다.
2010년, 퇴직한 나는 전부의 정력을 선전보도사업에 바쳤다. 해마다 자비로 2만 여원을 투자해 왕청현의 각 기업, 사업단위, 향진, 가두, 학교에 심입해 민족문화, 선진모범, 화목한 가정 등 신문선색을 광범히 수집해 선전보도 했다. 어떨 때엔 제때에 원고를 발송하기 위해 밤도와 원고를 작성해 신문매체에 보냈다.
신문전업소질을 제고하기 위해 나는 해마다 22종의 신문잡지를 주문해 탐독했다. 나의 신체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자 딸과 아내도 더는 나를 말리지 않고 근 2만원되는 전업용 사진기도 사주었다.
왕청에서 나는 어디로 가든지 사람들은 <<리선생>> 혹은 <<리기자>>라고 친절히 불러주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의 마음은 무한한 안위를 받는다. 나는 점차 사회의 인정을 받아 선후로 아홉 개 신문매체의 특약기자로 초빙 받아 지난 한 해 동안만 해도 전국 크고 작은 신문매체에 609편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길림조선족신문사에서 조직한 "좋은 남자 미운남자" 응모에서 금상을,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조직한 "건당 90주년"응모에서 금상을, 연변로인의 벗 신문사에서 조직한 "존로경로"응모에서 1등상을 수여받았다.
2010년5월14일에 설립한 왕청현 교육국로년총회 "연변로인의 벗" 신문기자소는 3명의 특약기자와 3명의 통신원들을 조직해 달마다 12일을 기자소활동일로 정하고 신문취재와 편집에 관한 이론을 학습하고 해마다 국가급에 21편, 성급에 18편 ,주급에 80여 편을 발표해 10년 동안 왕청현교육국계통의 발전을 위해 돌출한 공헌을 하였다.
신문보도사업은 나의 생활을 더욱 풍부하고 의의 있게 하였고 오직 신문보도사업이 나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리강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