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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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2-12 03:14 조회282회 댓글0건본문
이 글은 "한복 논란"과 관련해 쓰는 세 번째 글이다. 한국의 언론, 여당, 야당, 지어 대선후보들까지도 한복이 마치도 이른바 중국의 "문화공정"에 빼앗긴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 상황을 더는 잠자코 지켜볼 수가 없어 나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셨다.
"웃기지 마! 한복은 내 조상 대대로 입어왔고 내가 만주로 올 때도 입고 왔다. 문화대혁명이란 살벌한 세월에도 난 한복을 벗지 않았다."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한복엔 할아버지의 애환이 서려있다. 할아버지의 얘기를 오늘 이 글에 올린다.
18살 나이에 목에 엿판을 메고 동냥 길에 나섰던 할아버지는 우연하게 울산에서 일본 어선에 올라 일본으로 건너가 원양선 어부가 되였다. 할아버지는 험한 날 바다에서 생사를 걸고 일하다가 환고행할 때는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매고 시골에선 보지도 못한 승용차에 앉아 고향마을에 들어섰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벌어온 돈으로 고향에서 땅 몇 뙈기 사서 농사를 지었고 작은 정미소도 하나 차렸다. 당시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불사한 일제는 패망을 앞두고 최후 발악을 하고 있었다. 어느 하루 할아버지는 턱없이 많은 공출을 바치라고 하는 일본 순사한테 대들었다가 피터지게 맞고 며칠 유치장에 갇혔다.
성격이 강직한 할아버지는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훌쩍 고향을 떠나 만주 땅을 밟았다. 할머니 얘기로는 그때로부터 할아버지는 양복을 아예 입지 않고 항상 하얀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하얀 옷차림이란 한복으로 말하면 서민들이 입는 평상복이다. “양복쟁이”가 “백의민족”으로 변신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갈 때나 약초 캐러 갈 때도 하얀 옷차림을 하였는데 한번은 할머니가 왜 산에도 그런 옷차림으로 가는 가고 하니 할아버지는 “이 옷을 입으면 호랑이도 피해 가.”라고 무뚝뚝하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진짜 호랑이가 흰색인 한복을 무서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에 가면 흰색이 나는 물체가 적은 건 사실이다.
자고로 민족의 고유한 전통의상은 민족의 상징물로 되여 왔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55개 소수민족의 전통의상은 물론 한족들의 전통의상인 치포도 "썩어 빠진 봉건시대 물건 짝"으로 치부되여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화대혁명기간 한복을 더군다나 남자가 한복을 입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어느 날 할아버지가 한복을 차려입었다. 지금 보는 이 사진은 나보다 10살 위인 삼촌이 문화대혁명 기간 장가가는 날에 집 마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꼭 한복을 입으셔야 할 할머니는 그냥 밭일을 하고 돌아온 시골 할머니 차림새였지만(사실 할머니에겐 당시 연변의 말대로 치마저고리라고 하는 한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한복을 입으셨다. 허연 턱수염을 길게 기룬 할아버지가 한복을 입으시니 한결 늠름해보였다.
그 후 엉뚱하게 "한복 사건"이 터졌다. 당시 거주지 주민들을 관리하는 가두위원회에서 주로 성분이 좋지 않거나 자식이 투쟁을 맞거나 감옥에 간 부모들을 상대로 이른바 "사상개조 학습반"을 조직했는데 할아버지가 학습반 명단에 들었다.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 학습반에 갈 때마다 한복을 차려입고 갔다.
하루는 할머니가 나보고 할아버지를 따라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가를 지켜보라고 했다. 그날은 모주석의 업적을 칭송하는 자리인데 보통 침묵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불쑥 한마디 했다. "그래도 중국에선 장개석과 모택동이 호걸이지." 이 말에 방안이 발칵 뒤집혔다.
할아버지를 "타도하자!"란 구호소리가 연달아 터지고 학습반 참석자들이 할아버지를 향해 삿대질을 해대면서 할아버지를 성토했다. 한 자가 "저 봐 아직도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완고 통이야!" 라고 하니 할아버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조상 대대로 입던 옷이다. 너들은 지금 입고 있는 것이 옷이라고 걸치고 다니냐?" 하고는 문을 차고 나갔다.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에겐 한복은 자존심이였고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준 "가보"였다. 그 대물림 보배를 나뿐만 아니라 내 자식까지 지켜오고 있음을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한마디 부연할 말이 있다. 이번 "한복 논란"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사람들은 조선족들에게도 당신들 조상들처럼 대대로 물려준 "가보"가 있음을 명기하기 바란다.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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