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의 눈보라는 서리찬 장검을 뽑아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켰습니다. 푸르른 백두천지는 세 갈래 맑은 젖을 쏟아 우리의 말과 글을 키웠습니다. 동북의 넓은 벌은 가없이 풍요한 담요를 펼쳐 우리말과 글을 키웠습니다. 하여 우리말과 글은 백두의 굴함 없는 얼을 지니고 천지의 맑은 젖샘을 물고 햇빛 밝은 이 나라 꽃동산에서 마침내 한송이 하얀 꽃으로 피였습니다.
나라 잃고 부모 잃고 고향 잃고 살길 찾아 간도땅의 화전민으로 되였던 조상님네들! 그네들이 쪽박에 담고 온건 우리 말이였고 배낭에 짊어지고 온건 우리 글이였습니다. 너무나도 왜소하고 홀쭉했던 말씨앗 이였건만 세대를 이어 드디어 개척 땅의 농작들과 함께 하얀 꽃으로 피였습니다.
미주처럼 감미롭고 꽃잎인양 향긋하고 단꿈마냥 정겨운, 그야말로 반만년 긴긴 세월 민족의 슬기와 용기를 담아 금도끼로 찍어 내고 옥도끼로 다듬어온 우리말이며 어머님의 손부리 닳도록 금실과 옥바늘로 수놓아온 우리글이 아닙니까? 정말 슬기로운 조상들이 남겨준 불멸의 유산입니다.
정녕 그렇습니다. 말할수록 하고 싶고 들을수록 듣고 싶은 우리말입니다. 때로는 산곡 간에 돌돌 흐르는 청계수처럼 맑고 잔잔하고 때로는 천지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가슴을 푹 찌르는 우리말, 백의 겨레의 가슴가슴에 감동의 메아리로 전해지는 우리말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조선말은 힘이 없다. 중국에서 사는 만큼 조선말은 쓸모가 없다, 한어만 잘하면 된다. 외국어를 잘하면 제일이다 하면서 새로운 “조선어 무용론”을 외쳐대고 있습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한어와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문제는 당신은 조선족이면서 조선어를 천시하는 그 점입니다. 듣노니 이런 이들은 왜놈에게 우리말과 글을 위해 생명마저 빼앗겼던 지난날의 설음과 치욕을 그래 깡그리 잊었단 말입니까? 어쩌면 피 흘려 되찾은 자기의 소중한 말과 글을 그처럼 헌발·감발같이 천시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묻노니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천시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의 조상, 민족과 자기의 고향, 더 나아가서 조국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공산당제16차 당대표대회에서는 “민족정신은 한 민족이 생존하고 발전하는 정신적 기둥이다.”고 하였습니다. 언어를 떠나 민족이란 없고 민족문화를 떠난 민족정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작고한 정판룡 교수님은 세계 선진국 행렬을 향해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이 있기에 조선어는 그리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유 세계엔 3천개 민족이 있는데 7천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민족이 10개 있다고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조선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래 어떤 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없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일제의 36년 통치, 강제 봉금령, 이중문화 포위권, “조선어 말살론”, “조선어 무용론”, 10년 대동란 등 수난의 열두 고개를 톺으며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지켜올 수 있은 리유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막강한 군사력도 월등한 경제력도 종교적인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다름 아닌 문화의 무궁무진한 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절대 우리 민족의 터무니없는 자존자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것입니다.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이 땅에 뿌리내린 망국노 후대들이지만 오늘은 떳떳한 주인들입니다. 우리 삶을 끈기 있게 펴나가며 중화민족대가정의 한 송이 하얀 꽃으로 피기까지 자기의 말과 글이 함께 호흡했음을 아십니까! 장백산을 보십시오, 천고의 성산이 거룩한 건 우리 존재의 위엄이 높이 쌓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천지 폭포소리를 들으십시오. 장쾌한 북소리의 메아리는 우리 숨결의 고동이 전파를 날리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쩌고 지켜온 꽃입니까, 어쩌고 키워온 꽃입니까? 우리 어찌 그들이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얀 무궁화, 하얀 박꽃, 하얀 사과배꽃, 하얀 벼꽃은 우리 겨레들이 너무나도 아끼고 자랑하는 꽃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더 열심히 가꾸고 더없이 아끼고 사랑합시다.
/양봉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