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생일잔치에 간다던 아이가 일찌감치 혼자 오고 있었다.
발걸음이 느리고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
12시 50분.
학교가 파한지 얼마 안 되는 때이다. 이번에도 초대받지 못한게 분명하다.
아이가 현관까지 오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문을 미리 열어놓고 맞아 들일가, 생일잔치 따위는 기억도 못하는 척 해볼가, 좋아하는 콜라를 실컷 먹어도 잔소리하지 말가, 사랑한다며 안아줄가…
그러나 해답을 찾기도 전에 아이는 집까지 왔고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아이가 먼지 묻은 운동화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땀에 젖은 등을 보이며 제 방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였다.
유리컵에 얼음을 넣고 물을 가득 채우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화가 나고 슬프기까지 하다. 속상한 마음을 견디는 동안 유리컵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흘러내렸고 얼음이 반쯤 녹아버렸다.
아이는 찬물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얼음까지 깨물어 먹고 나서야 나를 보고 웃는다. 그러는 아이가 고마워서 나도 웃는다.
단 한번이라도 외토리가 되어본 적이 있는 아이, 얼굴에 생긴 흉터나 곱슬머리 때문에 놀림 당하는 아이, 생일초대 한번 받아보지 모한 아이들을 위해서 쓴 이야기입니다.
잊지 말아야 될게 있습니다. 외토리가 되더라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 나를 위해서 노래 부르고 초불도 켜고 선물도 준비할 수 있어야 해요. 나를 포기하지 말아요. 그리고 너무 오래 속상해하지 말아요. 나를 알아보는 친구는 가까운 곳에 반드시 있으니까요.
1. 빨간 동그라미 쳐진 날
식탁 옆에 걸린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싸인펜으로 토요일에 동그라미가 쳐져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9월 20일이라…”
아빠가 달력을 보더니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엄마는 밥을 푸면서 아빠를 보고 또 나를 보았다. 나는 아빠가 왜 찡그렸는지는 몰라도 9월 20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고 있다.
“엄마, 내가 벌써 성모얘기 했어요?”
“무슨 얘기? 너야 뭐, 만날 성모얘기뿐이 잖아.”
엄마가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그건 그렇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엄마한테 성모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댄다. 코미디언 흉내를 내서 반 애들을 웃긴 얘기, 음악시간에 피리를 불다가 “삑” 소리가 나니까 혀를 내밀어서 선생님까지 웃게 만든 얘기, 덩치만 믿고 집적거리던 애를 간단하게 혼내준 얘기, 실내화 코가 닳아서 발가락이 보였던 것까지.
그러니 토요일이 성모생일인 것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성모의 진짜 생일은 목요일이라고 한다. 목요일 수업이 늦게 끝나니까 생일잔치를 토요일로 미룬 것이다. 생일날 친구를 초대하고 싶어 하는 애들은 보통 그렇게 한다. 음력생일을 지내는 우리 집에서는 어림없지만.
음력이라는 것은 조금 까다롭다. 달력의 큰 수자아래에 있는 깨알 같은 수자가 음력인데 그나마 군데군데 찍혀있어서 날자를 찾으려면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따져봐야 한다.
내 생일을 찾을 때도 그랬다. 하필이면 화요일이라 친구들이 간식만 먹고 갔던 내 생일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변변한 선물도 못 받았고 친구들은 수수팥떡에 식혜만 먹고 얌전히 있다가 돌아갔으니까.
내 생일날에는 꼭 할머니가 오신다. 수수팥떡과 식혜를 만들어가지고 말이다. 생일날 그걸 나눠먹으면 아이가 건강하게 자란다나 뭐라나. 그러니 생일을 토요일로 미루거나 친구들이 떠들지 못하는게 당연하다.
“엄마, 생일선물로 뭐가 좋을가?”
“선물 주려고?”
“음… 선물이라, 생각해봐야겠네.”
“내가 주고 싶은 걸 선물하는게 좋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뭘 줄건데?”
엄마가 생긋 웃으며 나를 보았다. 마치 엄마 선물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림공책. 봄부터 그려서 꽤 두툼해요.”
“…”
엄마가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림공책이 선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셨나보다. 성모도 그걸 좋아할지 모르겠다. 별걸 다 그렸는데.
나는 성모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자주 성모를 눈여겨보고 별난 행동을 공책에 그리곤 했다. 그림공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모뿐이다.
나는 그리기를 좋아해서 혼자 끄적거리기를 잘한다. 작년에는 공책에 연지만 그리곤 했다. 끝내 친해지지 못해서 줄 기회도 없었지만 말이다.
단짝이 되고 싶은 애를 꼽으라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성모라고 말할 수 있다. 성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성모 곁에 항상 애들이 꼬여서 아직 가까워지지 못했다. 지나갈 때 “안녕?” 하거나 내 앞으로 공이 왔을 때 “차민서, 공 좀 차줄래?” 하고 말하는 정도일 뿐이다.
“성모는 분식집에서 생일잔치 한대요. 토요일 2시에.”
“난 또… 그래, 결국 성모얘기였구나.”
엄마가 중얼거렸다.
아빠는 별 희한한 소리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이 됐다.
“분식집에서? 김밥이랑 튀김 같은거 먹으면서?”
“요즘은 그게 류행이예요.”
“누가 아빠도 불러주면 좋겠다. 그런거 먹어본지 꽤 됐는데.”
“나만 집에서 해요. 시시하게 떡이나 먹으면서.”
그러자 엄마가 눈에 힘을 주고 보았다.
“너, 할머니한테는 그런 말 꺼내지마. 섭섭해 하시니까.”
“알아요. 그런데 아빠, 우리 토요일에 어디 안가지요?”
“가기는 어딜, 특근하는 날인데. 하필 토요일에.”
아빠가 어림없다는 듯 말했다.
엄마가 숟가락을 놓으며 아빠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밥 먹는 데만 열중했다. 아빠는 찌개가 맛있다고 했고 나는 닭알 찜이 고소하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는 엉뚱한 말을 했다.
“그렇구나. 이번 토요일이 성모생일이고 당신 특근하는 날이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