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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안의 책 읽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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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19-10-09 23:50 조회3,606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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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오후 3시쯤, 일을 끝낸 나는 청구역에서 전철 5호선을 갈아탔다. 빈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서서 두리번 살피던 중, 하나같이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승객들과 달리 앉아서 골똘히 책을 읽는 한 여인한테 눈길이 멎었다.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에 짙은 남색 원피스를 받쳐 입은 40대 안팎의 여인인데 우아하고 지성적인 매력이 나의 호감을 자아냈다.

 

어떤 책이기에 저토록 푹 빠져 곁눈하나 팔지 않을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가방안에 넣고 그 여인과 가까운 자리로 옮겨 서서 곁눈질해 보았다. 책의 글씨가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 여인과 책을 번갈아 보다나니 나의 사색도 나래치기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3학년이던 50여년전, 어느 날 아버지는 조선글로 번역한 중국의 고대명작 “삼국연의” 소설책을 사 오셨다. 누군가가 싼 값에 아버지한테 넘긴 거란다. 비록 새 책은 아니지만 페지수가 다 있어서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입담이 좋은 아버지는 옛날 이야기하기를 즐기셨는데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인 조조, 유비, 제갈량 등 이야기들도 가끔 하셨다. 아마도 귀로 익힌 이야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사 오신 것 같다.

 

뭐라도 팔지 않으면 돈이라곤 구경조차 못 하던 시절이라 “삼국연의”소설책은 우리 집의 가장 큰 사치품이고 ‘문화재산’이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가 “삼국연의”를 드는 건 별로 본 적 없다. 8식솔의 가장이고 안팎으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식사와 잠자는 시간 외에는 아버지가 휴식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일복이 많은 아버지는 자식들한테도 일을 많이 시키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나는 “삼국연의”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하교 후 집에만 오면 돼지 풀 뜯기, 볏짚 추리기, 저녁밥 하기 등 할 일들이 수북이 기다리고 있어서 책 볼 새가 없었다.

 

나는 “삼국연의”를 몰래 책가방에 넣고 학교에 갔다가 하학 후 곧바로 집 서쪽에 있는 벌판으로 갔다. 수풀들을 한쪽으로 밀어 눕혀 거기에 앉아 책을 펼치니 세상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 들었다.

 

‘화실아, 화실아~’ 갑자기 엄마의 애타는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고개를 들고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젖어들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엄마가 부르는 쪽을 향해 대답하고는 책가방을 챙겨서 걸어갔다.

 

호된 꾸지람과 매를 면치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후에도 조금이라도 짬만 생기면 “삼국연의”를 읽었다. 그러다가 주인공인 유비가 죽고 제갈량까지 죽으니 너무 슬퍼서 그만 책을 놓고 말았다.

 

며칠이 지난 후 “삼국연의” 끝부분도 마저 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책을 찾았을 때는 이미 동네사람이 빌려간 뒤였다. 책을 찾으러 나섰지만 동네에서 얼마나 돌고 도는지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에는 “책속에 황금가옥이 있다”라는 명언이 있다. 독서를 통해 남들이 축적해 온 지혜를 받아들이면 그만큼 많은 덕목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근데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에서 많은 정보량을 획득하다보니 진지하게 책 읽는 사람이 눈 뜨이게 줄었는데 나도 그 중 한사람이다.

 

2년 전, 나는 우연한 기회에 서울도서관을 들렀는데 깜짝 놀랐다. 어마어마한 수량의 책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다 무료로 빌려 볼 수 있단다. 나는 즉석에서 회원카드를 만들고 책을 한꺼번에 5권을 빌려왔다. (1인당 5권, 15일 가능함). 그런데 정작 책을 볼려니까 욕심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을 겸하고 있는 나는 느긋하게 품 놓고 책읽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꼭 보고 싶은 부분을 빼고는 그냥 조급하게 건성으로 읽고는 반환하는 수밖에.

 

여러 가지 사색이 훨훨 날고 있을 무렵, 전철은 어느덧 나의 도착지인 군자역에 도착했다. 나는 다시 한번 책 읽는 여인한테 일방적 눈길로 작별인사를 하고는 하차했다.

 

책 읽는 여인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혹시 역을 놓치는 건 아니겠지?

/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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