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높고 푸른 하늘에서 기름살 움씰대는 말 잔등 타고 내려왔다.
가을은 찬란하다.
하늘의 무지개 이 땅에 내려앉았다. 이 세상 고운 색갈 대잔치 벌린다.
빨간 단풍, 오렌지 빛 풀밭, 노란 벼 파도, 새파란 가을남새, 푸르른 호수, 쪽빛하늘, 보라색들국화...
푸른 하늘 흰 구름 담은 맑은 호수는 궁상 깊은 여인이 그윽한 눈길로 사색에 빠진 가을이다.
기러기 줄지어 분홍빛 노을로 날아드는 가을은 아름다운 세계를 펼쳐가는 시인의 상상이다.
산 꿩이 껑껑 울어 제짝에 화답하는 가을은 그리운 님 가슴에 품은 사모의 계절이다.
흰 치마 몸에 감은 봇 나무 반겨주는 언덕너머로 선들바람 불어오는 가을은 애모의 흥분으로 단풍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소녀의 두볼 만져주는 사랑의 계절이여라.
파아란 잔디에 얽혀 부푸는 젊은 가슴의 약동은 봄날의 달콤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청춘의 희망은 어두운 버드나무 숲속에서 새하얀 꽃으로 여름을 적어 남겼다
오늘,
성숙을 자랑하는 가을은 파도치는 흥분을 아름다운 동화로 엮어 사랑을 노래한다.
단풍잎으로 포장된 숲가 유보도는 나에게 감격에 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나무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리며 가을을 읽고 있다. 춤추며 내리는 나무잎에서
단풍놀이로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들에서.
멀리로부터 한 젊은이가 녀자를 업고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갓 결혼한 부부사이이리라. 젊은이 얼굴은 땀투성이다. 숨이 차 헐떡이며 고쳐 업으려는 듯 녀자를 번치에 내려놓는다.
ㅡ아니. 몹시 편찮으신 같은데
택시라도 불러 드릴가요?
어떻게 그냥 업고 가겠어요?
새파란 녀자는 관심어린 인사에 대답대신 깔깔깔 웃어댔다.
ㅡ아니에요. 전 안 아파요. 우린 명절을 쇠요.
그녀는 입에 물었던 단풍잎을 손으로 빼며 말했다.
ㅡ오늘 우리 결혼잔치 한돌이에요. 이 사람 금방 취직해 돈이 없어요. 꽃불촛불에 고급선물 못 사줘 너무너무 미안해 하길래 저는 그 대신 단풍구경 업고 시켜 달랬어요. 가난해도 랑만은 마찬가지로 있어야지요.
업고 업힌 젊은 사랑은 웃음소리를 선물하며 단풍길 속으로 멀어졌다. 감동과 부러움에 저도 모르게 혼잣말 나왔다.
ㅡ아니야. 가난하지 않아. 이 젊은 쌍쌍은 부자보다도 더 부유해.
저켠으로 한 할머니가 장애자차를 천천히 밀고 온다.
물이 날았으나 단정한 양복에 빨간 목도리 그리고 파도치는 흰머리는 그녀의 고상한 품위를 말해준다. 차에는 검은 안경을 낀 할아버지이다. 오래전 병환으로 앞을 잘 못 보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화목한 로인 부부이다.
나는 인사 끝에 허물없이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ㅡ안질이 좀 나으셨어요? 이 가을 나무들 똑똑히 보여요?
빙그레 웃음 지어주는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앞질러 대답하여준다.
ㅡ이 가을이 좋아 할아버지 시인이 되였다오.
바람소리로 푸른 하늘 보이고
새 소리에서 나무숲 보인다오.
눈으로 보는 가을 못지않은 귀로 듣는 가을이라오.
노년은 사랑의 끝자락이 아니다.
더더욱 익어가는 애모의 가을, 변함없는 사랑의 가을이다.
나는 사색으로 숨 쉬는 높은 하늘을 즐긴다.
상상으로 타오르는 붉은 노을을 사랑한다.
아니. 무엇보다도 랑만으로 불타는 단풍의 계절을 노래한다.
계절은 가을
가을은 단풍
단풍잎마다 아름다운 이야기 담고 고향의 산은 빨갛게 불타고 있다,
오늘도.
/손홍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