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쓴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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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2-12 03:21 조회319회 댓글0건본문
벌써 썩 오래전인 1961년, 나는 고급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아주 고민하고 있었다. 진학을 싫어서가 아니라 로동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어머님의 거처문제가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고중입학통지서가 내려오자 기쁨보다 근심이 앞섰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학교 갈 준비 때문에 둘째누나는 한돌이 금방 지난 나의 외조카를 업고 10여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걸어서 우리 집에 왔다. 단돈10원을 딸랑 들고는 왔지만 학비 때문에 아무것도 살수 없었다. 그래도 이불은 있어야 하기에 베치마나 베보 따위들로 무어 물감을 들여서 만들었는데 나의 갖춤새에서 유일한 새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떠나는 날 아침, 갑자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누나도 나도 번갈아 불러보았지만 묵묵부답 이였다. 한참 뒤에야 집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우리가 다가가자 어머니는 어린 아이처럼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어머님께서는 열둘이나 되는 자식을 낳으셨으나 불행하게도 그중 아홉이나 잃으셨다. 어머님41세, 아버님 39세 때 나는 열두 번째로 태어났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부모님들의 피줄을 이어나갈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데 일제의 패망을 앞둔 1945년1월13일, 내 첫돌 생일 34일을 앞두고 지금으로 말하면 새파란 청춘 40세를 일기로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으니 우리 집에 들이닥친 불행은 그야말로 참혹하였다.
부모님께서는 그래도 남은 셋이라도 살려보려고 큰 누나는 “개똥녀”, 나는 “요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여덟 살이 지나서야 큰 누나는 “채복”, 나는 “봉송”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다. 나에게 6살 될 때까지 젖을 먹였다는 어머니께서 나와 떨어진다는 것은 병아리를 잃은 어미닭 격이였다. 그래서 매일매일 안절부절 못하다가 정작 떠난다고 하니 마침내 통곡하고만 것이였다.
아쉽지만 나는 부모님 곁을 떠날 수 없게 되였으며 그처럼 바라던 진학의 꿈을 접지 않으면 안되였다. 가난하니 무슨 용빼는 수가 있으랴!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돈이 있어도 공부를 하지 않는다. 납득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알아본데 의하면 그런 애들이 상당수라고 하는데 이는 후대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은 그 무슨 자랑거리가 아니다. 가난할수록 성공한다는 말은 더구나 아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오늘날 우리 어린 세대들에게 가난이란 이 쓴 열매를 얼마간 맛보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입에 쓴 약이 오히려 몸에는 리롭다고 하는데 얼마간이라도 쓴맛을 보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양봉송
1944년2월17일,훈춘시 경신진 로전촌 출생.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선언어학부 본과 졸업 . 1968년부터 경신진 회룡봉학교, 경신중학교, 훈춘5중에서 조선어문 교직원. 2004년 정년퇴직 . 훈춘5중 재직기간 200여편 학생작품 지도 신문잡지에 발표, 58편 우수지도상, 그중 15편 1등 지도상 수상. 전국'인재'컵 교원 글짓기 경연에서 3등상 수상. "하얀 꽃 한 송이"등 수필 10여 편 발표. 2006년 “회룡종촌사”, 2013년 훈춘5중 학생 작품집 “자리정돈”, 2019년 “훈춘조선족 발전사”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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