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병에 깃든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2-07 02:50 조회303회 댓글0건본문
오늘은 청명날, 해마다 이날이면 우리 부부는 언제나 월병을 사들고 시골 산비탈의 시어머님 산소를 찾는다. 월병 하면 우리 부부에게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가슴 아픈 소원이 깃들어 있다.
“여보, 난 이제 대학 졸업해 월급을 타면 우리 엄마께 매달 한 상자씩 월병을 사드리겠소.”
“네. 그렇게 해요.”
이는 신혼첫날 그때만 해도 대학생 이였던 남편과 내가 한 약속이다. 젊은 시절 너무 고생하며 살아오신 시어머님 소원이 월병을 마음대로 잡숫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시어머님은 일곱 살에 불행하게 전염병으로 양친부모를 다 잃고 오빠의 손에서 자랐다. 구차한 살림을 돕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주린 창자를 이끌고 10살부터 남의 집 삯일을 하였고 일제시대에는 하남다리공사장에서자갈까지 나르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셨다고 한다. 팔자가 사납다고 열일곱살 어린 나이에 스무살 이상인 남편의 후처로 시집을 갔음에도 삼년 만에 남편이 폐결핵으로 저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딸아이 딸린 과부신세가 되였으니 후에 재가를 오게 될 때에는 집안형편을 따질 여건도 없었다.
그때 시집에는 전처의 다섯 살 되는 딸, 연로하신 시할머님, 시집가지 않은 시고모님 등 열식솔도 넘는 대가정이 함께 살고 있었다. 게다가 시집 온 이튿날부터 때식거리를 걱정할 정도로 째지게 가난하기로 소문난 집이였다.
그 이듬해부터 남편이 병환에 눕게 되면서 가정의 무거운 짐은 어머님 혼자의 어깨로 짊어져야 했다. 연로하신 시할머님 시중에 병환에 있는 남편을 돌보랴, 자식 여섯을 키우랴, 팽이처럼 돌아쳐도 할일은 태산 같았다. 수차로 이혼하고 두 조카까지 데리고 친정에 찾아온 시고모도, 온갖 구박을 다 주는 시누이와 주렁주렁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궂을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다 해도 집안에는 해 뜰 날이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생산대에서 한다하는 남정들과 같은 공수를 받을 정도로 뼈 빠지게 일하시고 밤에는 또 한푼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려고 새끼줄을 꼬면서 밤을 지새우군 하였다. 하지만 봄철에 밭갈이가 끝나기 바쁘게 양식이 떨어져 온 가족은 항상 배고픈 고생을 하였다. 무우밥, 쇠투리죽, 하루하루 겨우 끼니를 에워야만 했는데 시어머니의 얼굴은 항상 부석부석 부어있었다. 매일 산더미 같은 땔나무를 혼자 하여 짊어지다보니 허리는 그냥 구부정하여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어머님이 밭고랑같이 주글주글한 주름에 뼛마디가 툭 튀여 나온 거칠은 두 손, 오륙십대 아줌마가 아닌 나이보다 훨씬 늙은 할머니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도 아마 젊어서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과연 그 막막한 세월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사는게 너무 힘들어 뒷산에 목매고 자살하려고 시도까지 했다가 발목잡고 울고 있는 아들딸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허리띠 졸라매면서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우리 어머니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지만 우리 남매가집에서 책 만 들면 일을 시키지 않았소. 내가 자습하여 마을 첫 대학생으로 길림대학에 가게 된 것도 다 어머니 덕분이지.”라고 남편은 항상 회억한다.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 배곯는 세월 애들한테는 늘 건더기라도 더 주고 자기는 멀건 국물로 때를 에우고 어쩌다 색다른 음식이 생겨도 다 자식들 챙기셨다는 엄마, 이것은 아마 가장 소박한 엄마의 사랑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해 추석, 장춘에서 일하는 막내시삼촌이 시집에 오시면서 월병 두개를 들고 왔다고 한다. 월병도 배급으로 인구 당 공급하는 돈이 있어도 맘대로 살수 없는 세월이라 줄을 길게 서가면서 겨우 네개를 산중 두개를 추석선물로 들고 오신거다.
그때만 하여도 도시에서나 월병구경 겨우 할 때라 이곳 시골에서는 월병을 본적도 먹어본 적도 없었다. 노긋노긋하게 잘 구워진 월병, 칼로 자르니 보기만 해도 달 것만 같은 속살에 살짝 비치는 땅콩, 저절로 군침이 스르르 도는데 엄마의 손을 바라보며 언제면 나누어 줄가 어린 자식들은 군침을 흘리며 애타게 기다린다.
“와~ 너무 맛있어. 엄마 드셔봐.”
그나마 헴이 든 큰아들이 엄마한테 먼저 드린다.
“엄마는 단걸 먹으면 배탈 나서 너희들 어서 먹어.”
남매들 다 크고 나서 나중에 시어머니는 그때 이야기를 늘 옛말처럼 하시면서 언제면 살림이 펴서 맘대로 월병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강인함과 뒷바라지 보람으로 남편은 길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주정부에 분배받아 끝내는 첫 월급을 타게 되였다. 54원 50전, 이제는 어머니한테 월병을 사드릴 수 있구나 라는 기쁨에 월급봉투를 손에 들고 허겁지겁 뛰어온 남편을 기다리고 있은 것은 청천병력 같은 소식 이였다.
어머님이 당뇨병말기로 불시로 졸도하시여 병원에서 운명을 기다린다는 것 이였다. 희미한 등불아래혼수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드실 수도 보실 수도 없는 어머님, "엄마, 월병! 엄마, 월병! "애처롭게 부르짖는 남편의 목소리, 어쩌면 무정한 세상은 꼭 어머님과 맞장을 뜨는 것 같다.
어머님은 사흘 뒤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끝내는 아들이 당신의 소원 풀어 드릴려고 했던 월병을 맛보지도 못하신 채로…
세월이 흘러 내 나이 60대를 넘어서고 우리 살림도 풍요롭게 여유로워 졌다. 그래서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이 더 아프다. 우리부부는 월병만 보면 그 고생스런 세월에 고통과 애로를 이겨내면서 강인하게 자식을 키워온 어머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오늘도 우리부부는 어머님의 산소에 월병을 묻고 절절한 그리움을 안고 서서히 자리를떠난다.
지금쯤 시어머님은 천국에서 안식을 하고 계시겠지… /김경희
연변신세기리더십센터 전임 소장 및 고문 연변대학평생교육동문회 애심회 부회장 중앙조선말방송 “녀성세계” 객좌강사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