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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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2-07 02:54 조회270회 댓글0건본문
어릴 때의 기억으로는 우리 형제간이 하나같이 앓음 자랑에 볕을 볼 날이 없었다.
부모님들은 병원 출입에 신발이 닳아 떨어졌고 애들은 쪼그랑 오이처럼 시들쌔들 자랐다. 나는 형제 중에서도 유명한 약골이였다. 동지섣달 긴긴밤에 폐렴으로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나를 아버지는 그 높은 등에 업어 주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활 열리면서 시원한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잠간 등에서 내려 놓으면 또 울고 불고 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돌이 금방 지난 아기도 아닌데 얼마나 힘들었으랴. 지금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그 모습, 넓은 등이 한없이 그립다.
홍열병으로 네살배기 언니와 두살배기 동생을 잃은 아버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집에서 쓰던 망치하나 잃어 버려도 아까운데 아버지의 핏덩이를 잃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아팠으랴. 중년 남자의 그 눈물은 오뉴월의 서리로 되였다. 마음속 깊이에서 토해내는 그 오열에 앞마당에서 뛰어놀던 닭들도 까치발을 하고 조용조용 걸어 다녔고 굴안의 꿀꿀이들도 하루 동안 먹이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처마 밑 강아지도 한쪽 켠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미물들도 인성이 통하는 것 같았다.
봄이면 아버지는 밭갈이 하려 산에 다니신다. 보습 날에 걸려 나오는 쇠투리 뿌리를 한줌두줌 모아서 찬거리로 들고 집에 오시는데 엄마가 힘들어 한다고 도랑물에 깨끗하게 씻어서 부엌에 놓는다.
밭갈이가 끝이 나고 씨를 뿌리기 시작하였다. 생명력이 강한 풀꽃들이 머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그 풀꽃들을 삽으로 떠서는 앞마당에 옮겨 놓았다. 야생 란초는 넓은 부추 같은 이파리를 가졌고 생명력이 강하여 잘 자랐다. 조그마한 붓 같은 망울을 지우다가 식지 손가락만한 가는 꽃을 피운다. 잉크에 적셔놓은 것처럼 속은 하얗고 중간은 남색인데 너무 예쁘다.
아버지는 촌에서도 유명한 도끼 목수였다.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 모형을 만들어 주셨고 둥근 벽시계 판을 만들고 아라비아 수자 형제를 1부터 차례로 촘촘히 그려 넣었다. 시계 바늘과 추까지 벽시계를 너무 빼어 닮아서 진가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수수짱 껍질로 만든 수레는 마치도 그 옛날 수재 공자님이 산동 일대를 휘저으며 타고 다니시던 울이 낮고 바퀴가 큰 수레와 닮아 있었다. 진흙을 되게 반죽하여서는 손바닥 크기의 맷돌이며 사발이며 종지를 만들었고 곰방숟가락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땡볕을 피하고 서늘한 그늘진 곳에서 말렸다. 어찌나 견고한지 물에다 놓아도 흐트러짐이 없는 진짜 질그릇 모형이었다. 깜찍한 장난감 방앗간도 차려 주었다. 쌍발 비술나무가지를 베여서 방아 몸체를 만들고 방아 홈은 진흙으로 꽁꽁 다져서 만들었는데 너무도 희구하여서 동네 집 할머니들이 구경하려 와서는 혀를 끌끌 찾다.
아버지는 그렇게 손재간이 많았다. 돈이 귀하던 그 시절에 우리 형제의 장난감 담당 전문이셨다.
아버지는 구들 고래를 잘 놓는다고 동네방네에 소문을 놓았다. 가마목 정지를 낮게 하고 문턱을 넘은 방구들은 좀 높이면 불길이 잘 들겠는데 동네 분들은 그 반대로 방에 연기가 뚝 떨어지면서 구새통을 찾는다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척척 박사인 우리 아버지가 고쳐 주시면 그 집은 평생 연기가 부엌으로 되돌아 나오는 일을 면하였다. 의사가 제집 병을 못 고친다고 우리 집은 예외였다. 논밭 가운데 집터를 잡았는데 추운 겨울을 제외하곤 부엌과 구들 고래에 물이 차 있었다. 불이 잘들 리가 없었다. 엄마는 늘 코물과 눈물을 쥐여 짜며 밥 한끼를 지었다. 그러다가도 찬바람이 떨어지면 조금 나았다.
아버지는 종래로 자식들에게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조곤조곤 타일러 주셨다. 독서에 흥취를 느끼시고 베개 밑에는 어디에서 빌려 왔는지도 모를 책이 놓여져 있었고 석유 등잔불 밑에서 책을 보시느라고 밤을 새웠다. 동네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유식함을 많이 닮았다고 하였다. 유전자의 힘은 이처럼 신기하고 묘하다.
아버지는 술을 그렇게 반가와 하셨지만 한 달에 배갈 술 한 근이 고작이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월급봉투 타는 날이면 닝게루 병사리에다가 받아다가 드렸었다.
점잖고 유식하던 아버지, 자식들 때문에 속을 많이 태우신 때문인지 60여세 때부터 발목이 말째더니 걸어 다니시기 너무도 힘들어 하셨다. 큰 병원에서 진단도 해보지 못하고 돌팔이 의원 한테서 송곳 같은 침대로 그 아픈 침을 맞았다. 행여나 나을까 싶어서 요행을 바라며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맞았다. 하지만 병은 들기는 쉽지만 치료는 하늘의 장대 겨룸이었다.
그러시다가 70 주년이 되는 해에 불시에 저세상에 입적하였다. 아무런 예고와 준비도 없었다. 그렇게 떠나신 길이 마지막 길이였고 한 인생의 마무리였다.
나에게 뼈를 주신 그 이름 아버지, 자신이 아버지 그 나이가 되여서야 아버지를 느끼는 이 멍청이 같은 딸, 있을 때 잘해야지 뒤늦은 후회가 무슨 쓸모가 있으랴.
다재다능한 우리 아버지, 천당에 가서도 남을 많이 도우면서 잘 지내시죠? 친구들과 이웃하면서 다정하게 보내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남옥란 2022년1월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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