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8월에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세 꽃나이에 길림성 왕청현 대흥구진 화신학교에 배치 받았을 때 정향란은 인민교원의 자부심으로 이 세상을 혼자 독차지한 듯싶었다.
그러나 기쁨은 얼마가지 못했다. 그를 맞아준 것은 허름한 단층 교수청사에 초라한 교수설비, 꾀죄죄한 옷차림의 시골조무래기들이였다. 교실이라고 들어서니 바닥이 펄썩펄썩 먼지가 이는 흙바닥 이였다. 이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현실 앞에서 당장이라도 보따리를 싸지고 시골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떠나자고 보니 초롱초롱한 눈길로 선생님만 쳐다보는 수십 명의 조무래기들과 시내에서 온 선생님을 맞이하게 되였다고 기대에 찬 선생님들의 눈길을 피할 용기가 없었다.
《나를 키워준 모교에서 민족교육의 첫 발자국을 떼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사업에 착수했다. 그때로부터 날마다 도시락을 챙겨가지고 다니면서 교실을 꾸민다, 학생들에게 개별보도를 해준다, 애들의 머리를 깎아준다 하면서 열성을 다했다. 저녁이면 밤늦게까지 교수안을 쓰고 세 개 마을에 널려있는 학생들의 가정을 찾아 방문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사업여건을 자기의 독립사고 능력과 사업능력을 키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고 열심히 뛰였다. 그의 사업은 점차 학생과 학부모,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3년 만에 《왕청현우수교원》으로 평의 되였다. 1989년 9월, 그는 사업의 수요로 왕청현 제2실험소학교에 전근된 후에도 로교원들을 찾아다니며 허심히 배우면서 《말을 적게 하고 일을 많이 하는》사업태도로 맡은바 사업을 착실히 해나갔다.
그가 맡은 학급 30명 학생가운데는 부모와 함께 있는 학생은 3명뿐, 친척집이거나 남의 집에 더불어 사는 학생이 11명, 리혼 가정자녀가 8명, 기숙생이 3명이나 되였다. 이런 어린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직접 받지 못하기에 심리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년령단계의 학생들이라고 해도 학습, 생활, 습관, 성격, 애호 등 면에서 차이가 천차만별 이였다. 하지만 담임교원으로서 그는 늘 《어느 학생이나 모두 내 자식과 같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주었다.
우선 매 학생들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그들의 부동한 심리 특점과 개성에 따라 부동한 교양대책을 강구하는데 모를 박았다. 한 학생은 학습 성적이 하도 차해 주눅 들면서 동학들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한자리에만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장점이 있었다. 청소를 알뜰하게 잘해 윤기가 날 지경 이였다. 정향란 교원은 그에게 위생관리위원이라는 책임을 맡기고 교실청소부터 시작해 담당구역청소에 이르기까지 전면관리를 하도록 이끌어주었는데 제법 착실하게 잘해나갔다. 조회 때마다 그를 칭찬하면서 용기를 북돋아주었는데 점차 활기를 띠면서 학습임무 완성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였다. 또 한 학생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공부에는 아예 뒷전이고 위 학년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들떠 있었다. 몇 번 불러다 훈계를 했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다. 선생님을보면 슬슬 피해 다니면서 남자애들과의 래왕을 끊지 못했다. 향란 교원은 보호자와 연계를 취해 바깥출입을 줄이게 하는 동시에 조용히 불러다 속심을 나누었다. 우선 무용과 글짓기에 장끼가 있는 우점을 긍정해주는 한편 사춘기를 잘못 넘김으로 해서 생기는 모든 《후과》들을 알아듣기 쉽게 해석해주었다. 이외에도 많은 학생들을 찾아 속심을 나누면서 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으로 정성을 쏟으니 애들도 그를 어머니처럼 믿고 따라주었다.
다년간 담임이라는 어려운 중임을 떠메고 사업하는 와중에 향란 교원에게는 한 가지 습관이 형성 되였다. 언제 어디서나 문득문득 나의 학급, 나의 학생 나의 교수현장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는 것이다. 이렇게 머릿속에 떠올릴 적마다 하루의 사업에서 잘못된 것이 없는가, 빼놓은 것이 없는가를 되새겨보는 것이 습관화 되여 늘 근심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학교일 , 학급 일에서는 잊고 못하는 일이 없다.
/리강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