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 파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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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1-23 20:07 조회317회 댓글0건본문
8살 때 나의 별명은 앵두 파는 소녀였다.
아마 내가 소학교에 금방 입학하였던 7월 중순 쯤 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올망졸망한 다섯 자식에 단돈 10전도 구하기 어려운 째지게 가난한 시골의 살림살이에 매일매일 입을 걱정 먹을 걱정 때문에 가난의 고통을 침묵으로 지키면서 열심히 살아오셨다. 당시 한 학생이 한 학기 수업을 끝마치려면 책값 5원이면 족했지만 어머니는 매일 근심걱정이 태산 같았다.
“여보 저 마당의 앵두가 2.3일지나면 익을 것 같구만요. 저 앵두를 장에 가져다 팔면 애들 책값이라도 물게 되고...”
걱정을 쏟으며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였다.
지금은 시골의 길가에서나 시가지의 정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앵두나무지만 가난의 세월에는 그런 앵두나무도 흔치않은 존재였다. 그때 우리 집에는 큰 앵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여느 집 애들이 과자랑 사탕을 먹을 때 나도 빨간 앵두를 먹을 수 있어서 하루하루 앵두가 익어가기만 손꼽아 기다리는 나였다. 하지만 책값을 물어준다는 한마디에 귀맛이 동했다. 매일매일 책값을 바치지 못한 학생들 호명에 빠짐없이 읽어주는 내 이름 석자 때문에 나는 아침수업 전시간만 되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책상 밑에 떨구고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렸었으니 말이다.
며칠이 지나서 아버지는 보자기를 땅에 펴놓고 한 알 두알... 알알이 무르익은 앵두를 땄다. 올해 따라 마당의 두 그루의 앵두나무에 빨간 앵두가 가지가 부러지게 잘도 열렸다. 보기만 하여도 입맛을 돋우는 빨간 앵두, 광주리에 듬뿍 담긴 앵두를 아버지는 나한테 넘겨주었다.
“얘, 너 이 앵두를 장에 갖고 나가 팔어. 한 컵에 10전 씩 하면 돼.”
책값걱정에 마음 조였던 나였던지라 아버지가 넘겨주는 앵두 한광주리를 별로 투정 없이 장에 가지고 나갔다. 장거리에 앉아서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유리컵에 작은 손으로 앵두를 담아서는 한 컵에 십전씩 한 잔 한잔 야무지게 장사를 시작하였다. 얼마 안 돼 애들이 우르르 모여들어서 너 한 컵 나 한 컵 하면서 한광주리의 앵두는 순식간에 다 팔렸다. 나는 장사의 즐거움으로 깡충깡충 콧노래를 부르면서 빈광주리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내 인생의 첫 장사는 그렇게 순조롭고 ‘호황’을 이루었다.
집에 돌아와서 한 잎 두 잎 쇠돈들을 모아서 헤어보니 도합 5원40전, 첫날장사로 번 돈은 이튿날 나의 책값으로 학교에 바쳤다. 인젠 더는 책값을 물지 못한 호명에서 내 이름 석자는 없어졌고 더는 애들 앞에서 가난의 부끄러움 때문에 아침자습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지루한 아침자습시간이 지나기를 안타깝게 기다리지 않게 되였고 당당한 모습으로 문예위원답게 애들 앞에서 박자를 치면서 노래도 열창시킬 수 있게 되였다.
두 번째 날, 아버지는 가지에 남아있던 앵두를 몽땅 따서 또다시 한광주리의 앵두를 나한테 넘겨주었다. 첫 장사의 즐거움과 희열로 나는 주저 없이 또 한 광주리의 앵두를 장에 가지고 나가 한번 해본 장사 솜씨대로 아주 능숙하게 한 컵 한컵씩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순식간에 다 팔았다. 두 번째 장사 수입5.70전, 그 돈으로 어머니는 곧바로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남들 앞에서 민망스러울 정도로 구멍 난 바지를 입고 다니는 둘째 언니한테 지어 줄 광목바지감을 끊어왔다.
앵두로 얻어진 장사의 기쁨으로 우리 두 자매는 더는 가난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게 되였다고 온종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냈다.
3일째 되는 날, 등교하여 얼마 안 되여 애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xx가 앵두장사 하였대. 앵두 파는 애다.. ㅎㅎㅎ 캐드득”
애들의 비난의 웃음소리도, 눈총도 아랑곳 않고 재간 없는 너희들이니 그럴 거라는 생각으로 무시해 버렸다.
하루 동안의 수업을 끝마칠 무렵, 마지막 학급생활회의시간이 되었다. 최근에 반급에서 존재하는 문제적발 순서가 되였다. 학생들의 자유발언순서로 돌아갔다.
옥희가 먼저 시작했다
“xx는 소생산에 참가하였습니다. 앵두를 장에 갖고 나가서 팔았습니다. 학생이 소생산에 참가해도 됩니까?”
“xx는 반혁명로선을 걷고 있습니다.”
당시 8살 난 애들이었지만 ‘혁명’구호는 누구나 뒤질 새라 그렇게도 잘 불렀다. 이구동성으로 외쳐대는 애들의 비난소리에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소생산의 의미가 무엇이고 반혁명로선이 무엇인지도 똑똑히 알 수없는 철없는 그 시절에 나는 가난한집에서 태어나 그 가난을 조금이라도 이기고 살려는 당찬 어린소녀였지만 책값을 낼 수 있다는 희망하나만으로 시작한 앵두 파는 소녀가 엄엄한 그 당시 반혁명의 소녀로 될 수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엄마와 아빠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왜... 왜 내가 소생산을 한다는 걸, 내가 반혁명로선을 걷는다는 걸 아시면서도 부모님들이 철모르는 나에게 앵두장사를 시켰는지...’
그날 생활회의가 어떻게 끝났던지. 다만 지금도 그날 총화가 마무리되면서 홍소병제1기 입대에 추천할 아이들 투표선거에 소생산의 딱지 때문에 공부 잘하고 노래 잘 불러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던 내 이름 석자는 없었던 일만은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그날 밤 앵두장사로 잠간이나마 가졌던 우리 집의 희열은 침묵으로 소리 없이 흘렀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던 어머님, 민망스러운 얼굴로 나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연신 못난 엄마와 아버지를 만나서 니들한테 미안하다는 말만 하셨다.
그날 저녁 나는 잠자리에서 방 너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흐느낌소리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말소리를 들었다.
“시부모가 항일투사라는 것도 죄인가요? 항일투사면 뭐하나요? 당신은 빛 좋은 가정배경 때문에 어디에 가나 그 배경의 뒤에서 고상한척만 하고 살아야 하고 죄 없는 쬐끄만 애를 시장에 내보내고 저렇게 어린가슴에 대못을 박을 줄이야...”
가난의 죄인이 된 어머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미여지는 가슴을 안고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지금도 어머니의 안타까운 한숨소리와 그날 밤 자정이 지나서도 잠자리에도 안 드시고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애꿎은 엽초만 태우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듯하다. 당시 항일투사의 아들인 아버지, 며느리인 어머니로서는 그 앵두를 장에 갖고 나갈 엄두도 못 내고 가난의 막부득이한 사정에 철부지인 나한테는 별로 큰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고 나를 앵두소녀로 장에 내보냈을 것이다.
나는 가끔 나의 가난했던 동년시절의 이야기를 아들한테 들려준다. 철모르던 내가 돈 5원 때문에 8살 어린나이에 앵두를 팔았고 그 앵두 파는 소녀 때문에 나는 홍소병 넥타이를 제1기에 목에 걸 수 없었다는 그 세월의 이야기를 아들애하고 하면 설마 하는 식으로 그 시절의 가난의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세상 부족함이 없이 풍요로운 생활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지금의 애들이 그 세월의 우리들의 아픔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제 날의 앵두파는 소녀는 황혼을 맞는 중년아줌마로 되어버렸지만 그때의 앵두파는 소녀의 가슴 아팠던 이야기는 지금도 아픈 추억으로 아련히 남아있다. /김미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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