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나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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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1-23 20:00 조회518회 댓글1건본문
세월은 유수와도 같이 흘러 아내와 결혼한지가 어제 같은데 어느덧 44년이란 세월이 흘러 머리에는 흰서리 내리고 이마에는 얼기설기 주름살이 늘어났어요.
나는 1951년도에 시골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유복자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전쟁에서 희생했고 촌에서는 내가 열사자녀라고 해서 기업에 추천해 주어서 몇 년간 차운전을 하였어요. 나는 한단위에 있는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였고 1977년 1월 2일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가난하기로 소문이 난 우리 집에는 고작 이불 두 채에 그릇 몇 개만 달랑 있었어요. 아내는 없는 살림에 임신까지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하였어요.
결혼 후 아내는 가정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하려고 콩나물과 여러 가지 채소를 되거리하고 빈대떡 장사까지 하였고 임신 막달까지 삯일을 하면서도 아들 둘을 낳았어요.
돈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하다보니 아내는 친척집 군일에 가면 항상 말없이 부엌에서 일만하였고 그래서 모두 내 아내를 몽당치마 아주머니라 불렀어요. 비싼 신식옷 한 벌도 변변히 사지 못하고 친척들이 입던 옷들을 가져다 깨끗이 빨아서 입으면서 불평 한번도 안 했어요. 간혹 아내 친척집 군일에 다녀와서는 마음이 상해서 가만히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어요.
무능한 남편을 만나 자존심이 상한 아내는 이를 악물고 악착스레 살림하면서 아들 둘을 훌륭하게 키웠어요. 큰 아들은 일본류학가서 석사 ,박사 학위를 따고 지금일본에서 결혼해서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작은 아들은 한국에서 회사에 출근하다가 결혼해서 며느리와 같이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귀여운 딸을 잘 키우면서 행복하게 보내고 있어요.
나의 아내는 가난한 살림에도 촌에서 부녀주임사업을 하면서 호평을 받아왔고 애들에게는 훌륭한 어머니 이었고 남편에게는 조강지처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현모양처로서 동네방네에 소문이 자자하였어요.
그 후 나는 퇴직하고 아이들이 모두 제 밥벌이를 하니 아내만 한국으로 진출하였어요. 아내는 한국에서 친구의 소개로 식당일을 얼마간 하다가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말에 간 병일을 하게 되였어요. 2011년 6월부터 2018년 까지 공동간병일을 하였는데 철창 없는 감옥과 마찬가지였대요. 병실에서 간호사와 보호자들의 눈총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프면 약을 먹으면서 이를 악물고 악착스레 7년간이나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아내가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혼자서 집에서 술만 마시고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탓에 술중독이 와서 20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어요. 내가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비행기표를 끊어 가지고 밤도와 내가 입원해 있는 화룡병원으로 달려왔어요. 입원하고 있는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아내는 엉엉 울었어요.
나의 아내는 오자마자 누나와 고모가 수고했다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의 병시중에 전력하였어요. 주치 의사를 찾아 약도 제일 비싸고 좋은 것으로 쓰게 하고 수혈도 하면서 병 치료에 돈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하였어요. 음식도 병에 따라 영양가에 따라 대접받았지요. 나는 날따라 얼굴화색도 달라지게 좋아졌고 아내가 걸음 연습도 끈질기게 시킨데서 20일 만에 퇴원하게 되여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당시 우리 집은 초가집이였는데 집이 빈 사이에 쥐들이 사처에 구멍을 내고 구들 고래까지 메워 놓은 탓에 불 땔 때면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나와 집에 있을 수 없었어요. 아내는 뛰어다니면서 시가지에 한 달에 300원씩 하는 세집을 맡았어요. 그리고 3개월 살다가 연길에 있는 나의 누나네 집근처에 인사하여 살게 되었어요. 아내는 내가 병이 좀 호전하자 병치료할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나를 누나에게 부탁하고 또 다시 한국으로 돈 벌러 나갔어요.
아내가 한국으로 일하러 나간 몇 년 뒤에 난 일보러 화룡에 갔다가 버스에서 내리다가 쓰러져 구급차에 호송 되여 연변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대요. 나의 누나와 조카가 달려와서 나를 전면 검사시키고 호흡기 달고 인공호흡을 시키면서 야단법석 이였대요. 누나는 한국에서 일하는 나의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당장 돌아오라고 했대요. 아내는 군말없이 인차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나를 연변병원에 입원시켰대요. 나는 십여 일 간 치료하고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돌아와 얼마 안지나 한국에 있는 작은 아들이 결혼식을 한다 하여 나와 아내는 한국에 나가게 되였어요.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집에 돌아 왔고 아내는 한국에 남게 되였어요. 아내는 또 다시 간병일을 하다가 작은 아들집에서 손녀를 돌보게 되였어요.
손녀를 돌보면서 아내는 매일 전화를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하면서 나에게 문안하였는데 2020년 12월 7일 아침 아내가 전화하고 문자하여도 내가 응답이 없자 누나에게 전화해서 우리 집에 가 보라했대요. 누나가 우리 집에 와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는 이미 쓰러져 혼미상태에 처하여 있었대요. 누나는 급히 구급차를 불러 나를 연변병원에 호송했대요. 난 호흡기를 달고 링거를 맞으면서 구급치료를 받았대요. 하루에 치료비용이 1만 5천원이 들었고 중환자실에서 3일간 치료를 받고 누나네 집 가까이에 있는 연길시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치료를 받았어요.
한국에 간 아내 코로나로 인해 연길직행 비행기 표를 못 사고 남경비행기편으로 남경에서 두주일 동안 격리하고 또 연길에 와서 2일 격리하고 집에 와서 자가격리를 계속했지요.
나는 연길시병원에서 23일간 입원치료하고 완쾌하지 못한 채 아내가 집에 오니 퇴원하여 집에 왔어요. 아내는 저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집을 소독도하고 나를 목욕도 시키고 옷도 갈아입히고 엉덩이 욕창부터 살펴보고 드레싱 해 주었어요. 소독수로 상처부위를 깨끗이 닦고 한국에서 갖고 온 약을 상처에 뿌리고 붕대로 세균이 들어가지 못하게 봉해주었어요.
아내 한국에서 간병일을 해 보았기에 간병인을 쓰지 않고 본인이 하기로 했어요. 아내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나의 상처를 둘러보고 변기를 비우고 세수를 시키고 팔다리를 안마해 주었어요. 식전에는 사과를 깎아 챙겨주고 아침은 닭고기, 소고기국과 여러 가지 입맛에 맞는 밑반찬에다 식사를 차려주었지요. 식사가 끝나면 엉덩이 욕창 드레싱을 시키고 병원에서 욕창드레싱을 하루에 한번 하던 것을 아내는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하고 체형변경도 두 시간 아니면 세 시간 한 번씩 했기에 나의 엉덩이 욕창이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어요. 이렇게 아내의 정성어린 간호 하에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면서 피부이식을 해야 한다던 나의 욕창은 아내의 끈질긴 노력 하에 40일 만에 나아졌어요. 걷지 못하던 나를 열심히 부축해 주면서 운동을 시키고 물리치료를 시켜준 덕에 한 달 만에 홀로 걸을 수 있게 되였어요. 나의 누나와 조카는 너무나 좋아 하였으며 여러 친척들도 나의 아내가 왔기에 내가 살아났다면서 기뻐했고 나의 아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아내는 이렇게 나의 병시중을 들면서도 화룡에 있는 새집을 장식하느라 두 달 동안 연길에서 화룡으로 오갔답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만 못지않게 집장식을 하였고 가정살림기물도 새롭게 사놓았지요. 2021년 9월 10일에 화룡 새집으로 이사 갔어요
아내의 이런 정성에 나는 늘 감사하며 살고 있으며 눈물겹도록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의 아내는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고 가정에서도 현모양처로 존경받고 있어요. 다정다감한 나의 아내는 나에게 두 번이나 생명을 준 천사이지요. 하여 나는 오늘 이렇게 고마운 아내라고 소리 높이 말하고 싶습니다.
2022넌 1월 2일 /최민수 구술 박금옥 대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