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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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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1-16 20:07 조회3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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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이 돌아 오면서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아파나서 잠을 설치군 한다. 이런 밤이면 술로 마음을 달래군 한다. 오늘은 생전에 그렇게 술을 반가워 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선히 안겨 오면서 저도 모르게 자신을 주체 못하고 저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께 편지를 띄워 보낸다.  

 

우리 조상들의 적관이 지금의 한국의 진주이다. 조상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간도에 들어와 화전을 일구었으니 우리 아버지는 화전민의 후손인 것이다. 지금 연변 룡정의 화전자골에서 4대독자로 태어나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귀엽게 어리광부리며 동년을 보냈다. 아버지 위로는 누나 한분, 아래로는 여동생 두 분이 계셨는데 누님은 부모님과 함께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소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기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 일제가 망하자 중학교를 지금의 덕신에서 다녔다고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룡정에서 멀지않은 광신촌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  열아홉살 나던 해에 세살우인 우리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 후 홀몸으로 내몽골에 가서 교편을 잡았었고 1952년부터 지금의 룡정의 개산툰 소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그때는 6.25전쟁시기였는데 내가 태어난 날이 바로 6월 25일인 6.25전쟁이 일어난 날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문학의 길에 들어 선 것은 잠시 교원사업을 접고 연변대학 조문계에 입학하여 다시 공부할 때부터였을 것이다.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새로운 사업 터인 길림시 조성족중학교에 가서 그곳에서 10년간 중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짬짬이 글을 써서 발표하였다. 당시 아버지는 연변작가협회 회원이였다. 발표된 작품들로는 내가 읽어본 것들만 기억나는데 “아버지의 비밀”, “나루터의  쑹령감”, “어머니와 아들”, “새날의 일”, “감정삼계단” 등이 있다.

 

한번은 우리 남매가 집에서 장난치며 놀다가 점심준비로 끓이던 화로우의 장사기를 뒤엎으면서 녀동생의 잔등에 화상을 입히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선 아버지는 다짜고짜 형과 나의 뺨을 한 개씩 때리고는 녀동생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울면서 뒤따라 나섰고 우리 형제는 겁나서 엉엉 울었다.

 

점심때가 되니 배가 고픈 우리는 쏟아진 감자 장건데기를 주어먹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 온 아버지의 손에는 당시에는 좀 희소한 콩 골무찰떡이 들려 있었다. 아마 집에서 굶주리고 있을 우리 어린 형제들이 생각나 그랬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내가 다섯 살 나던 해였다. 아버지는 우파로 몰렸다. 그때 보통 우파모자를 쓴 사람들은 로동개조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월급을 깎았는데 삼십원 조금 넘는 월급으로 우리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연변 룡정 봉림동에 계시는 할아버지 집으로 나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아버지는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 집으로 할아버지와 나를 보러 온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소학교때 아버지는 로동개조하던 야장간에서 쇠톱으로 연필을 깎는 손칼을 세 개나 만들어 가 져다 준 일이 생각난다.

 

우리 집에는 그때 책이 많이 있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영향 하에 나는 독서를 즐겨했다. 그때 제일 많이 읽은 책들로는 세권으로 된 장편소설 “삼국연의”와 “집 없는 소년”, 중편으로는 “구리단추” 등으로 기억된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꼬깔모자를 쓰고 북을 메고 코피를 흘리면서 학교 마당에서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로 되여 투쟁을 맞았다. 어머니는 기가 막혀 혼절까지 했었다. 십년 만에 날이 밝아 4인방이 타도되자 아버지는 해방되었으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해방되는 날을 끝내 보지 못하고 불쌍하게 돌아 가셨다.

 

집권파에서 해방되어 근 10년 동안 집에서 농사일을 하였다. 그동안 정책이 낙실되어 길림시의 원 중학교와 연길 조양천학교들에서 초빙하려 했으나 가지 않고 화룡 룡문중학교에 가서 교원으로부터 교도주임사업까지 하다가 그곳에서 퇴직한 후 여생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문학생활의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편소설을 즐겨 쓰셨는데 노년에는 제대로 되는 중편소설을 쓰겠다고 원고지와 모질음 쓰며 씨름하다가 끝내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아버지 한생에는 비록 장거는 없었지만 노고는 많았었다. 아버지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 필력, 문재는 잇지 못했었다. 하여 언제나 미안하고 마음이 쓰리다.

 

아버지, 돌아오는 청명에는 원고지 한 묶음을 아버지 산소에 가져갈게요. 하늘나라에서 계속 원고지와 씨름하세요.

 

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둘째 아들  강응철 올림

2022넌 1월 8일

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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