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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내 발 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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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1-04 22:41 조회3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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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5만원(중국 돈)의 거금을 들여 고향마을에다 120평짜리 2층 집을 짓고 도시 아파트도 울고 갈 정도로 실내를 고급스럽게 장식하고 풍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려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엄지를 내들며 나를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하루아침에 1등 복권에 당첨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7세부터 장장 33년이란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가시덤불로 뒤엉킨 아리랑 고개를 나 홀로 걸어오면서 시련 같은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룩한 것이다.

 

1962년도 내가 8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나면서 10식솔의 대 가정에 일하는 노력이란 아버지와 어머니 둘뿐이어서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제일 가난했다. 그런데 '복은 쌍으로 안 오고 화는 홀로 안 온다'고 그해 봄 지탑을 잡고 논을 갈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논두렁에 쓰러지고 그 길로 영영 떠나셨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39세였고 어머니는 35세의 꽃나이로 청상과부로 되였고 현 중학교에 다니는 제일 큰 누나가 17세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맞들고 벌어도 째지게 가난하던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자 어제, 오늘의 순서로 올망졸망한 우리 8남매의 목숨이 나약한 어머니의 한 몸에 의지해야 했다. 살길이 막막하고 앞길이 캄캄해서 삶의 용기마저 잃은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눈물을 흘리시었다.

 

그러던 어머니는 어느 날 눈물을 거두셨다. 우리 8남매를 위해서 어떻게 하나 먹여 살려야 한다는 모성과 일념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는 태어 난지 얼마 안 되는 나를 업고 생산대 일에 나갔고 가정의 생계를 위해 큰 누나도 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를 도와 생산대 일에 참가하면서 어린 동생들을 돌봤다.

 

하지만 당시 생산대에서 년말이면 일한 공수에 따라 부농을 타고 공수에 따라 식량도 분배하던 시기라 어머니와 누나가 버는 공수로 배당되는 식량은 제한된 것이 여서 우리 집은 부농은 그림의 떡이고 대신 해마다 눈덩이 커지듯 빚만 늘어만 갔고 식구가 많은 우리 집은 늘 보리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쌀독이 거덜이 났다.

 

그래서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한반의 애들은 모두 새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다녔지만 나만 헌 보자기에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다녔고 설 명절이나 "6.1" 아동절이면 다른 애들은 모두 새 옷을 입었지만 나만 형들이 입던 낡은 옷을 줄여서 입거나 기워서 입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더 불리려고 한족들과 입쌀 1근에 수수쌀이나 옥수수가루를 2근을 더 받고 먹다 보니 우리 집은 설 명절이나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만 흰 쌀밥을 구경할 수 있었기에 학교에서 원족을 가거나 생산대 모내기 지원을 갈 때면 다른 집 아이들은 하얀 입쌀밥에 계란을 싼 도시락이지만 나의 도시락은 깔깔거리는 옥수수떡에 짠지였기에 나는 애들과 함께 먹지 못하고 늘 한쪽 구석에서 혼자 먹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 내 친구들이 학교운동장에서 자전거를 씽씽 타고 다녔지만 나는 그냥 부러운 눈길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5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나는 가난을 원망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너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마저 원망스러웠다.

 

그 후 '가난한 집 아이 먼저 헴이 든다 '고 내가 17살을 먹던 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생산대 노동에 참가하면서 나의 친구들은 당시 유행되었던 120원짜리 상해표 손목시계를 모두 손목에 걸었고 반짝반짝한 구두를 신고 다녔지만 나는 조금도 부럽지가 않았고 친구들이 TV, 녹음기, 이불장, 옷장 등 가정 집물들을 구전히 갖추고 장가를 갔지만 나는 달랑 이불 한 채에 입던 옷을 그냥 입고 장가를 갔으나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고 더는 가난한 나 자신도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할수록 나 자신만 더 비참해졌다. 그래서 나는 꼭 내 두 손으로 이 가난을 이겨내고 부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나에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오기와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낮에는 생산대 노동에 너무 힘들어 저녁이면 꼼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밤이면 이를 악물고 새끼를 꼬고 거적을 짰다.

 

그 후 호도거리를 실시하자 1.2헥타르 논이 차려졌고 나는 과학을 믿고 열심히 일하면서 부업도 계속했다. 하여 몇 년간 수익도 괜찮았다. 그러다가 농약, 비료 등 생산물가와 의료비, 학잡비, 생활용품 비용이 밤을 자고 나면 청정부지로 치솟는데 반해 벼 가격, 쌀 가격은 삶아 놓은 소고기처럼 쫄기만 하니 1년 내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남는 수익이 없었고 가정 영위와 생계가 점점 힘들었다.

 

그래서 복장장사에 나섰는데 1년 만에 그만 4만원이란 빚을 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삶의 희망과 끈을 놓지 않고 백방으로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1997년도 봄에 8만원의 2푼이자 돈을 맡아 브로커에게 주고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나는 산 설고 물 설은 타향에서 위험과 모험이 처처에 도사리고 있는 열악한 환경과 노동 강도가 세기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노가다 현장에서 하루 이틀도 아닌 20년을 뼈를 깎이고 기름을 짜이면서 일했고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돈을 벌었고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지난해 뭉치 돈을 쥐고 귀국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쨍-"하고 해 뜰 날이 왔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 몇 번의 20년이 있으랴만 그 20년이란 지루하고 아득한 고역과 암투의 나날이 있었기에 오늘의 풍족한 생활과 행복한 삶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세상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짜란 없다. 내가 갈 길은 오직 내 발 밑에 있는 것이다.

/허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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