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단어를 뜻풀이하면 “대방의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말하지 않고 끝냄”을 말한다. 이 두 글자를 읽거나 말하기는 쉬우나 막상 그대로 행한다는 건 쉽지않다.
돈을 주는 것도 좋겠지만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와 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준다면 아마도 금전을 받는 것보다 더 좋아할 것이며 칭찬 또한 뒤따른다. 그만큼 용서란 너그럽고 고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용서가 너무 린색하다. 그래서 마구 헐뜯고 서로 저주하고 또는 질투, 미워하는 현상이 수두룩하다.
그 누가 잘못하면 가슴에 새겨 넣고는 두고두고 증오하며 싸움이 일어나도 서로 용서함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는 병원신세 지어는 법놀음까지 당하고 만다. 기실 한걸음만 뒤로 물러서거나 용서한다면 이런 일은 피면할 수 있다.
15년 전에 나는 이런 감명적인 일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최모란 사람이 리모의 일곱 살 나는 아들애를 데리고 들놀이를 가는 도중에 차사고로 죽게 되었다.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우던 아들애를 잃은 리모의 가슴은 란도질 당하듯이 아파났다.
비록 고의적은 아니지만 자기의 차실로 남의 집 자식을 잘못 되게 하였으니 최모는 이제 대방의 욕과 저주를 받을 것은 물론 옥살이도 면치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리모는 욕 한마디 없이 되려 그를 위안했다.
“심리부담 갖지 마오. 고의적이 아닌데”
“난 죄를 지었으니 어떻게 처벌해도 할 말이 없소. 속 시원하게 마음대로 하오”
최모의 말에 리모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참 내가 당신을 어떻게 처벌해도 애는 다시 살아날 수 없지 않소? 인제 또 낳으면 되는 거니까 싹 잊으라구”
이렇게 말하는 리모의 눈은 진작 푹 젖어있었다. 아들을 잃은 비통의 눈물이였다.
그때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리모의 넋은 흉금과 처사에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웬간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녀인은 남편이 외도를 한다는 일을 알고는 싸움도 없이 리혼을 제기했다. 그녀한테는 옷가게 세개가 있었는데 자기는 하나만 가졌다. 친구들이 그런 남편이라면 하나도 안 줘도 무방하다고 하면서 왜서 그렇게 바보짓을 하는가고 물었다.
“난 딸애 하나여서 식구 둘이지만 애아버지는 인제 그 녀자와 또 아이를 낳을 것이니 그러면 식구 셋이 되겠으니 가게 두개는 있어야 살아갈 수 있지요. 애 아버지가 잘 못 살면 저희 딸애가 속상해할 것이고 또 딸애의 애탐이 저의 애탐이지요”
그 후에 리혼한 남편이 몇 번이나 좋아하는 녀자를 데리고 그녀의 가게에 와서 거들먹거릴 때도 그녀는 돌아서서 못 본척했다. 눈으로 안 보니 마음도 편안하단다. 소문나게 싸우지 않고 묵색이면서 조용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그녀의 행동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가하고 반문해보게 되였다.
기막히게 감동되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전설적인 이야기 같지만 확실히 우리 주변에 이런 녀자가 있다.
용서란 자존심을 잔뜩 높이는 사람, 리기적인 사람, 흉금이 좁은 사람과는 담을 쌓는다. 또한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늘 신경이 팽팽하여 저도 모르게 육체를 해치며 즐거움이나 편안할 수가 없다. 그러니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도 지치겠는가?
매일 모순과 갈등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는 용서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부부간의 용서한다면 사랑이 영원할것이고 형제, 친척 간에 용서한다면 화목한 기상이 보일 것이고 남남간에 용서한다면 서로간의 관계가 밀접해진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모두 유리한 용서를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박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