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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형수님ㅡ리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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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10-07 21:55 조회435회 댓글0건

본문


나는 지금도 형수님께서 형님과 결혼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형수님의 조건은 형님보다 더 좋았다. 중학교 졸업 후 마을의 상점 종업원으로 한 달 월급은 형님과 같다. 친정집에는 월급쟁이 셋이 있다. 그러니 당시 세월에서 남부럽지 않다.

 

형님의 인물체격도 그저 그렇다. 작은 눈에 작은 키여서 볼 데가 별로 없다.

 

형님의 조건은 딸 가진 집들에서 제일 싫어하는 맏아들에 호랑이 별명이 달린 아버지, 계모라고 소문난 엄마, 중학교를 다니는 남동생, 철부지 여동생이 있어 모두가 골치 거리다.

 

형수님께서는 이런 열약한 조건을 번연히 아시면서 우리 집에 시집 오셨다.

 

그 후 형수님께서는 고된 시집살이를 면치 못했다. 그런 형수님을 보노라니 가슴 아픈 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 왔다.

 

시아버지의 스트레스.

 

1968년 4월. 고향마을의 세 사람이 당시 우리가 이사를 와서 산지 3년도 안 지난 보흥마을 사거리에 대자보를 붙였다.

 

충격적인 내용으로 전 마을이 들끓었다.

 

"역사 반혁명분자 최사범을 타도하자!"

 

대자보를 읽은 사람들은 분노해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았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는데 모진 심문 끝에 다른 사람을 물어넣고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때 형수님께서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으랴. 1년도 아니고 3년 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형수님께서는 형님의 말을 믿고 한 번도 시아버지의 역사를 의심하지 않았다.

 

친정집 마을에서도 나의 아버지 역사를 의심하지 않아 반란파들은 형수님의 친정마을에 최사범 “보황파”란 모자를 씌웠다.

 

내가 역사반혁명분자 자식이라고 몰리자 경제면에서 남한테 위축 받을 까봐 월급 타는 날마다 나의 손에 5원을 쥐어 주셨다.

 

시어머니 스트레스.

 

소문과 달리 엄마는 며느리한테 못되게 굴지 않으셨다. 그런데 여러 가지 병으로 며느리를 고생시켰다. 엄마는 암으로 6개월 누워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뜨셨다.

 

그 사이 엄마의 대소변은 형수와 형님이 받아냈다. 한 번도 얼굴을 찌프리지 않고 말이다.

 

당시 할빈에 이사 간 나는 형수님 보기에 민망했다.

 

시동생의 스트레스.

 

고중에 입학하자 나는 형님에게 나의 학습계획을 말했다. 고중 2학년 전 학기까지 고중 3학년 학과목 진도를 끝내고 고중 2학년 후 학기에 당해 대학입시 시험을 치르겠다. 그런데 학교 기숙사 조건에서 이 계획을 실천할 수 없다.

 

형님은 나의 학습계획을 형수님한테 말하자 형수님께서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마을에 집을 잡고 통학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형수님께서 2칸 짜리 방을 구했다. 말이 2칸이지 방 가운데 커텐을 치는 방이다. 그래도 기숙사보다 학습 환경이 좋았다.

 

나는 학습 계획을 세우고 새벽 1시까지 공부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로어 단어와 문장을 암기했다. 형수님도 그때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었다.

 

학교와 3Km 떨어져 있기에 도시락을 싸야 한다. 반찬 그릇이 따로 없고 당시 "벤또"(일본말)라고 부르는 밥그릇에 4분의 3 정도 밥을 담고 4분의 1에다 반찬을 담는다. 겨울엔 괜찮지만 여름엔 반찬에 물기가 좀 있어도 밥이 금방 쉰다. 1년 6개월 통학했으니 형수님께서 도시락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으셨는지를 딴 사람은 모른다.

 

고중 2학년 하학기에 성 교육청에서 고중 2학년 학생 5명에게 당해 대학 응시자격을 주었는데 나의 이름이 그 속에 있었다. 형수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모른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하고 가뭇없이 사라졌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대학으로 가는 길이 사라졌다. 게다가 아버지께서 역사반혁명분자로 몰리는 바람에 개처럼 몰려대는 나를 보면서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2년 후 아버지께서 억울한 누명을 벗자 나는 중학교 교사, 현선전부 통신간사로 승진하였다. 형수님께서는 도처에서 나의 자랑을 하셨다.

 

그런데 이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1978년에 내가 대학에 가자 아내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지내야 하는 나의 가정의 무거운 짐이 형수님의 가냘픈 두 어깨 위에 지워졌다.

 

우리 가정에서 심한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받은 형수님께서는 10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 인생을 가꾸어주신 형수님, 나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수님, 리선봉!

정말 그립습니다.

/최영철

 

한국 부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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