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시월에 높아 가는 가을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색에 잠겼어요. 인생의 황혼을 덧없이 흘러 보내는 자신을 원망하다가 멋없는 인생을 뜻깊게 보내려고 생각을 고쳐먹고 북경관광길에 올랐어요.
제일 먼저 찾아 간 곳은 북경 천안문 광장이었는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기념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걸으며 담소하고 있었어요. 천안문 광장은 너무도 눈부시게 장식되어 아름다웠어요.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기 렌즈에 담으려고 애쓰면서 저도 모르게 "멋지다! 멋지다!"라고 외쳤는데 누군가 저의 어깨를 툭 치면서 "조선족분이세요? 연변에서 오셨어요?"라며 연속 질문하는데 어리둥절한 김에 "네. 연변 훈춘사람입니다."라고 하니 그는 큰 소리로 북경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니 무척 반갑다고 하는 것 이였어요. 알고 보니 그는 우리 민족의 유명한 국가 대극원 작곡가인 채동진 음악가였어요.
약룡 채동진 선생님은 1981년에 연변 훈춘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 났어요. 그가 여섯 살 나던 해 부모님과 같이 사가지에 가서 어린이들의 공연을 보았는데 손풍금 타는 꼬마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대요. 집에 돌아온 후 그의 끈질긴 청으로 무모님은 그에게 손풍금을 사주었대요.
손풍금을 산 그때로부터 음악에 몸을 담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부원장인 최순덕 등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중학시절에는 성. 시 손풍금 콩클에서 수차 일등상을 받아 안았어요. 북경에서 열린 전국 손풍금 콩클에서는 우수상까지 받았어요. 그 후에 연변의 저명한 작곡가인 최삼명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몇 년간 악리와 작곡의 기본지식을 열심히 배웠대요. 계속해서 그는 닫는 말에 채찍질하면서 음악의 길에서 멈추지 않고 노력한 끝에 2001년에 북경 중앙음악학원에 입학함으로써 중국의 최고의 음악전당에서 재능을 마음껏 키울 수 있었대요.
그는 중앙음악학원에서 유명한 지도교사학유아교수의 제자로 되였고 유명한 작곡가인 두명삼 선생님의 수업을 받을 수 있었대요. 이렇게 두 교수님들의 정성어린 가르침과 그의 피타는 노력으로 중국에 정율성 같은 별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어요. 그의 곡을 들은 사람들은 저 친구의 곡은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보는 것 같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음악 재능을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중국음악학원 작곡부 석사 연구생 공부를 했대요. 연구생기간인 2008년 중앙텔레비죤음력설문예야회에서 그가 창작한 "접련화"는 음악 1등상을 수상하였고 종합무대극"연안보육원" 등은 이 몇 년간 300여차 공연되면서 큰 히트를 쳤대요. 뿐만 아니라 "명문컵", "팔백리", "도정", "나의 집" 등이 널리 알려진 영화, 드라마, 무용 삽입곡들을 발표했대요.
중국음악 최고전당인 대극원에 2013년 그의 관악작품이 청년작곡계획 쇼 케이스 목록에 편입돼 국가대극원에서 공연되었대요. 이번 계기로 대극원 소속 작곡가로 발탁 되었대요.
그 후 그는 또 "약룡과 그의 친구들"이란 실내악단을 조직했는데 그 규모가 중국에서 최고라고 해요. 여기에는 아세아 배소일인자라고 불리우고 중국 일급연주자인 두종, 중국 10대 터너의 한 사람인 한봉, 소프라노 중국 일급 성악배우 양소용, 중국 저명한 청년 바이올린연주자 채홍화 등 유명한 국보급 음악인들이 모였대요. 이 수준급 실내악단의 창시자의 한 사람, 젊은 작곡가인 채동진이 바로 단장이구요. 중국에서 실내악단은 공백이나 다름없지만 선진국에서는 음악교육과정이 필수 전공으로 하고 있어요. 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당찬 도전을 해왔으며 실천하여 실내악단이 세계 순회공연의 길에 들어섰지요.
끝없는 그의 음악에 대한 도전은 끝나지 않았으며 정율성 일생 같은 보람찬 음악 일생은 영원히 빛을 발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 유미화
2021년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