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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유적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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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6-23 19:54 조회4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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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7일, 2021‘V연변관광’ 언론매체취재단은 왕청현 소왕청항일근거지 유적지를 찾았다.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유적은 왕청현 동광진 동림촌 동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20여 곳의 유적과 기념비들이 있었다. 왕청현 반일유격대 밀영, 병기공장, 인쇄공장 등 중요한 유적들은 복원되여 있었다. 근거지 유적지 길옆에는 하경지가 쓴 ‘왕청 항일봉화 동만대지에 불타오른다’는 제사비와 고수련이 쓴 ‘동만항전역사장랑’ 제사비가 세워져 있었다.

 

2015년에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유적은 성급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 되였으며 2018년에는 첫 길림성 동북항일련군 홍색교양기지로 명명 되여 성 당사당성교양기지에 들었는바 각급 당원간부들이 교양실천을 진행하는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

 

요해에 따르면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는 중공 동만 특위의 지도하에 있은 중요한 항일유격근거지였는데 동만 특위기관 소재지이기도 했다. 1932년 하반년, 중공 동만 특위 서기 동장영이 인솔한 특위기관은 연길현 왕우구에서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마촌으로 옮겨왔다. 1932년 12월, 중공 동만특위와 왕청현위의 지도하에 마촌에 정식으로 왕청현 소왕청구(제2구)쏘베트정부가 설립되였다. 1933년 11월17일부터 일본군과 위만군은 근거지에 대한 50여일 간의 ‘대토벌'을 진행하였는데 원래 1500여명 되던 항일군민 근거지가 4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1934년 1월, 중공 동만 특위와 중공 왕청현위에서는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소왕청구위 소속 당원들을 하마탕, 대왕위에, 전이하여 3구 당 조직에 합병시켰다. 특위기관과 왕청현위 기관은 십리평을 거쳐 요영구에 전이하여 투쟁을 견지하였다. 나머지 군중들은 각기 대황위, 요영구, 라자구 등지로 전이시켰다. 3월 21일, 동만 특위서기 동장영은 왕청현 동광진 묘구촌 부근의 대북구에서 일본군, 위만군 토벌대와 전투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는데 당시 27세밖에 안 되였다. 이곳에서 많은 혁명투사들이 희생되여 세세대대 전해지고 있었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풍부한 홍색자원에 입각하여 교양제도를 건전히 하면서 간부들의 정치자질과 당성수양을 높이고 있다. 또 길림성 왕청동북항일련군 홍색문화원기념관을 건설하고 교양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리강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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