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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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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5-08 23:14 조회554회 댓글0건

본문

2021년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으면서 작은 아들 최영철 드리는 글

1960년 아버지의 결단을 그린다

어릴 때 나의 인상엔 아버지는 매우 독한 분이셨다. 나의 동생 넷이 죽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한 방울도 보지 못했다.

 

귀여운 남동생이 죽었을 때 마을의 어른들이 오셔서 눈물을 흘리며 조문하실 때 아버지께서는 도리어 그 분들을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명이 고만하니 별수 없지. 어서 집에 가 볼일을 보오.”

 

이처럼 독하신 아버지의 눈물을 나는 1960년 겨울방학에 보았다.

 

그 전해만해도 방학에 집에 오면 마을의 식당에서 흰쌀밥을 먹었다. 그런데 1960년 전국의 자연재해로 중학교 식당에서 먹던 옥수수떡을 마을식당에서도 먹었다. 왠지 중학교 식당의 옥수수떡보다 더 먹기 힘들었다.

 

고향마을은 옥수수 농사를 짓지 않고 벼, 조, 콩 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왜 옥수수떡을 먹어야 하나?

 

상급 정부에서 ‘증구량’ 임무량을 대폭 증가한 동시에 촌민들 식량인 벼를 몽땅 실어갔다. 대신 현 양식창고에서 몇 년 묵은 옥수수가루를 줬는데 그것도 20% 적게 주었다. 그러면서 부족한 량은 자력갱생으로 해결하라고 했다.

 

외지의 양식절약 방법도 전해주었다. 옥수수 가루를 반죽할 때 산나물 들나물 옥수숫대 전분을 넣고 반죽하라는 것이었다.

 

옥수숫대 전분은 고향사람들이 처음 듣는 소리였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옥수숫대를 분쇄기로 분쇄한 후 그것을 큰 독에 절반쯤 넣고 물을 가득 붓는다. 하루 지난다음 옥수숫대를 건져내고 물을 쏟아내면 독 밑에 거무스레한 것이 드러난다. 이것이 전분이란다.

 

이것을 건져 옥수수가루에 섞어 힘들여 반죽한다. 주먹만큼 크게 둥글게 빚은 후 식판에 탁 친다. 그러면 평평한 밑굽이 생긴다. 다음 밑굽 중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움푹 들어가게 홈을 낸다. 이렇게 하면 설익지 않고 잘 익는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옥수수떡을 고향에서는 ‘워궈퉈우’라고 불렀다. 좀 식으면 단단해서 머리를 때리면 머리가 터질 정도다.

 

마을 식당에서 하루 세끼 ‘워궈퉈우’를 먹는다. 나는 눈물을 찔끔 짜면서 한 개를 겨우 먹었다.

 

당시 마을엔 독거노인 5명을 모신 경로원이 있었는데 여름에 한 노인은 머리맡에 ‘워궈퉈우’ 몇 개 놓고도 굶어 세상을 뜨셨다.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는 한족 마을에 가서 가을에 입쌀을 주기로 하고 밀가루 100근 꿔 오셨다. 그리고 경노원에 식모 1명 배치했다. 그런데 20일전에 밀가루가 거덜 났다. 그러면서 이틀 전에 또 한 분이 굶어 세상을 뜨셨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 할아버지의 시체를 염습하신 후 시체에 절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삼촌님 다 저의 잘못입니다.”

 

그때 나는 처음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아니 그 자리에 있는 마을 사람들도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보았단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탈곡장에 벼를 실어놓은 수레 10채 있다. 날이 밝으면 현양식창고로 떠난다. 그러면 10여명이 또 굶어 죽을 수 있다. 당시 60세 넘은 노인 7명 장기환자 6명이 있었는데 그들도 사경에 처해있었다. 임신부 한 분이 영양실조로 유산했다. 수유기 애엄마들이 젖이 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애들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께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 후 입을 여셨다.

 

“너의 사촌형을 데려오라.”

 

당시 창고관리원 겸 식당관리원인 사촌형님이 도착하자 아버지께서는 엄숙히 명령했다.

 

“오늘 밤 10수레 벼를 몽땅 가공해 한집에 100근씩 나눠줘라. 그리고 모레부터 식당문을 닫아라. 모든 후과는 대대장인 내가 책임진다. 실수 없이 처사해라.”

 

“삼촌 어떻게 하시려고?”

 

“내일 내가 인민공사 영도를 찾아가 벼 10수레 도둑 맞혔다고 신고하겠으니 뒤처리를 실수없이 해라.”

 

군대에서 정찰병이었던 사촌형님은 뒤처리를 깔끔히 했다.

 

아버지의 용단으로 마을에서는 굶어 죽는 사고가 더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3년 후에 경로원 식모의 말실수로 이 사건이 터졌다. 전 현에서 제일 큰 사건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마을대대장자리에서 철직당하고 10여일 사원투쟁을 받으셨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손수 개척하신 갱신촌에서 살 멋이 없다며 아래 마을인 보흥촌으로 이사하셨고 1986년 8월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셨다.

 

당시 현정부의 결정에 따라 아버지의 시체를 화장한 후 강물에 띄우기로 했다. 그런데 갱신마을 어르신들께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단다. 그들은 아버지의 골회함을 우리 가족 선산에 모셨다.

 

지금 고향 사람들은 고향 마을을 떠났으나 아버지께는 마을을 개척하신 분들과 함께 마을을 굳건히 지키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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