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구월의 가을날 고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올랐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한해동안 집에만 쿡 박혀 있다가 떠나는 길이라 모든 것이 새롭다.
창밖에서 휙휙 지나가는 넓은 벌에서는 옥수수, 벼들이 한창 톡톡 영글어가고 있었다.
사십여년 전에 농민들과 가을걷이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쉴 참에 휘어든 허리를 펴려고 축축한 볏단위에 펄쩍 드러누워 높은 하늘에서 둥둥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면서 나도 언제면 저 구름처럼 먼 도시로, 부모님이 기다리는 집으로 날아갈까 바라던 일이 어제 같다. 그 바라던 도시생활을 한지도 삼십팔년이나 된다. 그런데 그 시골이 그리워 찾아 떠난다. 기차역에 내리니 쏟아지는 장대비가 맞이해주었다. 우산도 없이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시골로 가는 버스에 오르니 물병아리로 되였다.
홍성대대 전 부녀주임 팔십고령의 독거로인 김여사님 댁에 들어서니 온돌방은 뜨끈뜨끈 데워졌고 가마에선 육개장이 보글보글 끓고 구수한 쌀밥이 뜨는 향기가 코와 위를 자극했다. 김여사님과 얼싸안고 그립던 인사를 하는데 구전촌의 문우님이 여동생까지 거느리고 마당에 들어서서 환성을 올렸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퍼더버리고 앉아 뜨거운 육개장에 밥을 말아서 뚝딱 비우고 나니 비에 젖어 으스스하던 몸은 서서히 따스해나고 히히하하 그립던 이야기, 지나온 이야기에 마음도 따스해졌다.
오후엔 이튿날에 열릴 문필회 식사준비로 야채도 손질하고 떡쌀도 씻고 고기도 손질하면서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를 반주삼아 이야기를 엮어가고 웃음꽃을 피웠다.
저녁에는 널따란 온돌방에 이부자리를 차례차례로 펴고 여자 넷이 누우니 어쩐지 옛날 집체호생활이 떠올랐다. 침대처럼 푹신 하지는 못해도 그 시절이 그리워 한없이 따스했다.
아들딸 여럿을 키워서 사회에 모두 내보내고 남편마저 저 세상에 보내고 십여 년이나 혼자 사신다는 김여사님의 살아온 이야기에 감동도 하고 눈물도 훌쩍이며 밤 가는 줄 몰랐다.
밤에 소피보려 나와서 마을을 둘러보니 불빛이 나오는 집이 몇 집 안 되였다. 뒷집도 옆집도 모두 비였다 하였다. 김여사님에게 무섭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습관이 되였다 하였다.
봄과 여름에는 쉴새없이 텃밭을 가꾸고 가을에는 손수 가꾼 채소랑 고추랑 다듬고 데치고 말리워서 한국이랑 청도랑 아들, 딸들에게 부쳐 보내고 손수 가꾼 콩이랑 혼자서 타작하여 된장, 고추장을 담궈 나누어주는 재미로 산다고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가을마다 익모초를 산더미처럼 베다가 익모초엿을 만들고 개머루도 산더미처럼 베다가 작두로 잘라서 물에 씻고 끓여서 우린 물을 고아서 개머루엿을 수십근이나 만들어 판 돈으로 생활비를 보태면서 아들딸들의 부담을 줄인다 했다. 부녀병을 치료한다는 익모초엿과 신장을 튼튼히 한다는 개멀구엿은 까마반들반들하고 흑진주처럼 빛이 돌았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땀이 흘러들었을까! 정성으로 빚어진 개머루엿을 뚝 떼 주시면서 몸에 좋다면서 먹어보라고 하셨다. 그 정을 거절할 수 없어 입에 넣으니 펄펄 끓는 가마앞에서 땀동이를 쏟으며 돌아치는 모습이! 그것도 혼자 몸으로 외로움을 우려서 엿을 고아내는 모습이 눈앞에 새물거린다.
인젠 아들딸 사는데 가서 노후를 편하게 보내시라 하니 일하던 사람이 놀면 병이 난다면서 안 가신단다. 손가락마디마다 툭툭 뼈져 나오고 허리도 구불어서 곧게 걷지도 못하시는 김재숙님이 팔십고령에도 땅을 파고 기음을 매고 낫질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찡해났다.
나는 이십대 처녀시절에도 농사일이 힘들어 어서 빨리 떠났으면 바라고 바랐는데, 겨우 오년을 보내고도 세상에 젤 고생한 것처럼 억울해 하였는데 이 분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이렇게 한평생 사시는 그이의 모습에 우러러 보게 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런 분들이 땅을 지키고 집을 지키면서 고향을 지키기에 떠나갔던 자식들이 돌아올 집이라도 있지 않는가!
이튿날 아침부터 우리는 떡쌀을 찌고 소고기를 삶고 붕어회를 치고 더덕찜, 산버섯채, 마른 명태무침 등을 준비하면서 김여사님의 정성을 다시 한번 만끽했다. 우리 회원들을 대접하려고 며칠 전부터 메밀을 베다가 두드려서 망에 갈아 메밀묵거리를 준비하셨단다. 한대야 가득 만들어놓은 메밀묵을 썰면서 꼬부랑할매가 어떻게 혼자 몸으로 이 많은 힘든 일을 하셨을까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였다. 오늘을 위하여 이 분은 얼마나 로고를 하셨을까 싶으면서 다시는 여기로 와서 폐를 끼치지 말자는 결심이 생겼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여기로 해마다 다섯 번은 더 온 것 같다. 김여사님은 농촌에 혼자 사는 집에 글 쓰는 교수님이랑 오시는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면서 온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고 싱글벙글이다. 난 어쩐지 그 모습에 울컥해난다.
이른 점심시간이 다가오니 교화시에서, 길림시에서, 그리고 구전진에서랑 고전자향에서 육속 문우들이 들어섰다. 서로 반가워서 포옹하고 웃고 떠들고 사진 찍고 하는 그 장면은 감동없이는 볼 수 없다. 내리는 비가 같은 지향을 가진 분들의 즐거움을 막지 못하고 열정을 식히지 못하는구나 싶다.
이어서 남성분들은 떡메를 휘두르고 여성들은 널찍한 온돌위에 앉음뱅이 조선족식 둥근상을 세개나 펴놓고 듬뿍듬뿍 담은 음식접시들을 올렸다. 정성들여 빚은 막걸리가 오르고 꿀에 담근 맑은 포도주가 따라진다. 맛과 멋이 어우러져서 모두들 기분은 오성급 호텔에서 대접받는 것보다 사치스럽지는 못해도 소박해서 더 좋은 것 같다.
모두들 텁텁한 막걸리, 향긋한 포도주에 기분이 둥둥 떠서 즉흥시가 나오고 유머가 터지고 문구들이 익어난다. 저마다 장끼자랑에 신난다. 낭송시, 노래, 춤으로 조용하던 동네가 들썽거린다.
부회장 선생님이 봉창욱시인님의 배꽃을 낭송하시는데 언제 외우고 연습을 하셨는지 국제방송국 아나운서를 내놓으란다. 우리들은 그 서정적인 낭송속에서 마치 배꽃아래에서 하아얀 머리수건을 쓰시고 김매는 엄마를 보는 것 같고 배꽃처럼 하얀 엄마의 손빨래가 밧줄에서 날리는 것을 보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음은 이 시로 지어진 배꽃노래가 독창으로부터 합창으로 번져 울렸다.
모두들 유머가 넘치는 만담에 배꼽이 빠지는 것 같았고 아리랑 스리랑 슬슬 넘어가는 노랫소리에 얼이 빠져 춤마당이 터졌다.
계속하여 문필회의가 막을 열어 회장님이 시, 시조를 평하고 부회장님이 총결하고 여러선생님들의 평어, 평론은 고조에 올랐다. 나도 흥나서 즉흥시 한곡 읊었다.
푸르른 늪에는 거위오리 동동
마을을 깨우며 떡메소리 쩡쩡
농가집 마당엔 개장국이 펄펄
우리네 문우들 술상놀이 한창
막걸리 한 사발에 시한수 읊고
개장국 한 그릇에 수필이 뜨네.
인절미 한 접시에 소설이 담겨
가을날 땡 볕에서 영글어 가네!
교수이면 어떻고 농민이면 어떠랴!
육십대면 어떻고 팔십대면 어떠랴!
석양빛에 즐거운 문화생활 타올라
노래가락 한마당 어께춤도 한마당!
시간은 어느덧 황혼으로 달려 떠날 준비를 하는데 김여사님은 회식에 남은 찰떡, 메밀묵을 한덩이씩 뚝뚝 베여서 회원님들께 싸주신다. 그래도 더 주고 싶어서 봄부터 가을까지 한포기, 한포기 캐고 데치고 말린 민들레말랭이를 매 회원님들께 보따리로 싸주시는데 그 진심어린 정성에 그 누구도 사양할 수 없어 받아주었다. 나는 김여사님의 갈라터진 터슬터슬한 두 손을 보면서 이 나물꾸러미를 어찌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선물이랴 싶어지면서 또 한 번 울컥했다.
시골농가의 온돌방에서 소박하지만 풍성하게 열렬히 진행된 이번 문학기행은 자연과 문학이 어우러지고 문우들의 열정이 내리는 가을비에 짓이겨져서 향기로운 시향이 되고 톡톡 익어가는 글열매가 될 것이라는 소망이 피어난다.
떠나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저어주시는 김여사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올 것을 약속하면서 벌써 그 때가 기다려진다.
온돌방에서 자라난 우리는 그래도 온돌방에서 펼쳐진 파티가 좋은 것을 어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