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의 서류함을 정리하다가 아들이 고중시절에 쓴 글 한 편을 다시 읽었다. 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잘 소장해 두듯이 아들과 딸의 관련 자료들도 분류를 해서 소장해왔다. 소장품에는 애들의 사진, 성적표, 졸업증, 작문, 상장, 국가 중요행사 참가 기념증서, 지어 친구들한테서 받은 연하장도 망라되어 있다.
애들 관련 소장품을 가끔씩 꺼내보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오늘은 아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아들의 고중시절로 돌아갔다. 딸은 소학교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해서 북경시뿐만 아니라 전국상을 수상한 적도 있지만 리과에 더 취미를 가진 아들은 글을 별로 쓰지 않았다. 오늘 본 아들의 글은 제목이 "위기감에 관하여"이다.
"고중시절 반주임 선생님이 학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글 한 편 쓰기 활동을 조직했다. 작가인 아버지에게 나에게 주는 글 한 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장기가 아닌 한어로 글 한 편을 썼는데 제목이 '위기감에 관하여'이다.
반주임선생님은 아버지가 쓴 글을 높이 평가했는데 토를 단 말이 나의 기분을 억망으로 만들었다. 반주임선생님은 나를 보고 "보아하니 문학적인 분위기가 있는 집안 같은데 너는 왜 학습성적이 항상 거꾸로 50명 꼴찌팀에서 헤매느냐"고 했다. 단임선생님의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자존심보다 가족에 큰 상처를 입혔다.
내가 분발하지 않으면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공부에 열중했다. 그 해 기말시험에서 꼴찌팀에 속했던 내가 학년에서 거꾸로가 아니고 앞으로부터 24위안에 들었다. 성적을 발표할 때 반주임 선생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고서는 한참이나 나와 성적표를 번갈아 보았다. 나의 성적이 상상밖이었던 모양이다.
성적 발표가 끝난 후 반주임선생님은 어떻게 한 학기 사이에 이런 '기적'을 이룰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위기감"! 반주임선생님은 아버지가 나한테 써준 편지가 원동력이 된 줄을 몰랐다.
위기감을 느끼면 그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다.
위기감을 느끼면 현실에 안주할 수 없다.
위기감을 느끼면 스스로 자신을 알 수 있다.
위기감을 느끼면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장손이고 장자인 나에겐 가문과 가족의 명예가 걸려있다. 내가 위기감을 느끼랴만 명예를 지켜나갈 수 있다. 나에게 위기감을 안겨준 아버지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이 세상에 별별 칭찬이 다 있지만 나는 딱 하나만 받고 싶다. 그것이 뭔가하면 '너, 아버지를 닮았다'는 칭찬이다."
글 마지막 한 줄에서 숨이 멎었다. 기뻐서가 아니고 너무나 충격이 커서. 지난해에 쓴 "항상 나를 지켜보는 눈"이란 제목의 글에서 "가정에서 항상 부모를 따라다니는 시선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녀의 시선이다"이라고 했다. 부모로서 살아가는 자체가 자녀들에게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자녀의 시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매서운 시선이다.
아들의 글에서 자식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아버지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또 그 자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아들의 고중시절 내가 아들에게 위기감을 주었다면 지금은 아들이 나에게 위기감을 안겨준다. 아버지는 거저 되는 것이 아니다.
/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