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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온돌쟁이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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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4-18 01:30 조회517회 댓글0건

본문

나의 고향에서는 구들 놓는 능수를 온돌쟁이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1945년 가을에 날 임신한 엄마한테 차례졌다.

 

1944년 여름에 동녕현 노흑산에서 살던 30세대가 일제 강제 이주민에 끌려 목릉현 서쪽 산골짜기에 부려졌다.

 

아무도 관계치 않는 이주민 30세대는 신흥촌 한족들의 도움으로 잠시 거처를 해결했다. 신흥마을 맞은 켠 산 밑에 마을자리를 정하고 1945년 여름에 집짓기에 총력을 쏟았다.

 

집을 지으면 구들을 놓는다. 그러자면 구들돌이 필수다. 당시 나를 임신한 엄마는 무거운 몸으로 3명 친척을 거닐고 구들돌 탐사에 나섰다.

 

한 달간 신고끝에 마을터에서 3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구들돌터를 발견했다. 구들놓기에 제일 큰 문제를 해결했다.

 

30채 집이 일어서기 바쁘게 구들놓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엄마는 무거운 몸으로 친척 4집의 구들을 놓았다. 불길이 잘 들고 구들도 골고루 따뜻했다.

 

그런데 다른 집들에서는 불길이 잘 들지 않고 또 썩구들이 생겨 구들이 차가웠다.

 

별수 없는 그 집들에서는 날 임신한 엄마를 청해 구들을 다시 놓았다. 엄마의 손길로 집집마다 불길이 잘 들고 구들이 골고루 따뜻했다. 이래서 마을사람들은 엄마를 온돌쟁이라고 불렀다.

 

엄마의 배 안에서 구들태교를 받아서인지 나는 형님과 달리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엄마가 구들놓기를 하면 말려도 따라가 구경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는 엄마의 구들놓기를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눈여겨보았다.

 

우리 집 구들을 수리할 때 키 작고 힘 약한 엄마가 큰 구들돌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고 키 크고 힘센 아버지가 잔심부름을 하는걸 보고 아니꼬운 생각까지 들었다.

 

동시에 내가 어른이 되면 여자한테 이런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작심했다.

 

1973년 봄에 장가간 나는 이듬해에 기와집을 지었다. 구들만 놓으면 집 없는 고생이 끝나고 새집에서 살게 된다.

 

나는 구들 놓기, 부엌 쌓기 재료를 장만한 후 엄마한테 내일 구들을 놓겠다고 알렸다.

 

그날 엄마는 일할차림으로 새집에 도착하셨다.

 

나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아들이 구들 놓는 걸 구경합소.”

 

“네가 구들을 놓는다구? 구들놓이가 장난인줄 아나?”

 

엄마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일에 손을 댔다.

 

엄마 때와 달리 구들 골 켜기를 막돌을 쓰지 않고 벽돌을 쓰니 속도가 빨랐다. 골을 6개로 켠 후 개자리도 좀 깊게 팠다. 굴뚝 밑도 한자 넘게 판 후 넙적돌로 3분의 2를 덮었다.

 

이렇게 하면 갑자기 굴뚝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부엌으로 향해 아궁에서 연기가 나오는 걸 예방한다.

 

다음 골 위에 구들돌을 덮었다. 그리고 작두로 썬 짚을 넣고 이긴 진흙으로 구들돌 틈새를 거미줄 쳤다.

 

부엌은 엄마 때와 달리 나무를 때는 부엌이 아니라 석탄을 때는 부엌으로 개조했다.

 

부엌 위는 가마솥 3개를 올려놓게 구멍 3개를 만들고 가마를 올려놓았다. 부엌아궁이엔 문이 달린 시설을 안치했다. 아궁의 오른 켠에 손풍구를 놓을 공간을 만들고 손풍구를 놓았다.

 

아내가 석탄불을 지폈다. 손풍구를 돌리자 불길이 삽시에 활활 타 올랐다.이윽고 가마 안의 물이 끓었다. 구들도 썩구들 없이 골고루 따뜻했다.

 

대성공이었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엄마와 아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소문이 200호 사는 마을에 쫙 퍼졌다. 당시 향중학교 교사인 나는 틀 없이 찾아온 사람들을 따라가 구들과 부엌을 손질해 주었다.

 

그 후 현기관에 출근하자 마을 사람들은 더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소문을 들은 동료들이 찾아왔다.

 

할빈으로 이사 가자 소문을 들은 동료들이 날 불렀다.

 

몇 년 후 할빈시정부에서 단층주택을 허물고 7층 아파트를 짓자 구들은 사라졌다.

 

대신 단지마다 중형 석탄보일러로 각 집의 난방시설을 덥혔다.

 

찬 방바닥엔 두꺼운 장판을 깔고 그 위에 넓은 전기장판을 놓았다. 그러니 새로운 구들이 생겼다.

 

한국에 오니 가스보일러로 방바닥을 덥힌다.

 

엄마는 내가 새끼 온돌쟁이로 되자 구들일에서 해방됐고 새끼 온돌쟁이인 나는 현대기술 발전 덕분에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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