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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길목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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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4-15 02:05 조회8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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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여름의 옷자락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앉아 땅을 지질 듯 기세를 부리던 삼복더위가 처서를 고비로 한풀 꺾여 밀물처럼 밀려오는 가을의 기세에 겁을 먹고 슬금슬금 자리를 내주고 뒤꽁무니가 빨갛게 저만치 도망을 간다. 벌써 여기저기서 가을의 정취와 냄새가 푹푹 풍기고 있다. 낮에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리더니 밤에는 매미에게 뒤질 세라 귀뚜라미들의 지독한 함성에 밤잠을 설친다.

 

앞마당에는 주렁주렁 달린 사과들이 총총히 등불을 달고 가을 햇살을 받아 더 붉게 반짝거리고, 논밭에는 당금이라도 꺾어질 듯 고개를 푹 수그린 벼 이삭이 메뚜기가 뛸 때마다 무거운 고개를 더 수그리고, 눈뿌리가 아프도록 사래 긴 밭에서는 쌍둥이를 들쳐 업은 옥수수들이 진 갈색의 수염을 내리 쓸며 봄가뭄과 여름 장마를 겪은 숱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서는 ㅅ자형으로 대열을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이 제 갈 길을 재촉한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저마다 형형색색의 고운 단풍을 반짝반짝 빛내며 가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이 가을의 길목을 서성거리면 내 눈도 기분도 마음도 응당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마땅한데 오히려 이 가을이 괜히 심기불편하고 슬퍼지고 심지어 질투가 생기고 거슬린다는 생각까지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라면 내가 지금 내 인생의 갱년기, 바로 가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이 풍성하고 아름다운 가을도 곧 다가올 겨울에 쫓기고 나면 겨울이 되고 내 인생도 겨울에 들어선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가을에 서서 이미 살아온 내 인생의 봄과 여름을 진지하게 뒤돌아보니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서 가정의 생계와 생활유지를 위해 다람쥐 채바퀴 돌듯 바쁘게 살았고 상품경제와 시장경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남이 걸을 때 나는 뛰고 남이 뛸 때 나는 뛰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세월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고 돈에 쫓기며 마치 스피드시대 단거리 선수처럼 쫓고 쫓기면서 언제 한번 좌우와 뒤를 돌아볼 새 없이 줄곧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리다 보니 어느덧 내 인생의 가을을 맞게 되었고, 내 나이도 60의 문턱까지 달려왔다.

 

그렇게 열심히 달린 보람으로 10년 전에 청도에다 113평되는 아파트에 자가용도 갖추었고, 딸애의 한국유학 4년, 미국유학 4년의 대학등록금을 대주었다. 지난해는 남부럽지 않게 딸애의 결혼식을 올려 주면서 아파트를 살 돈을 주었다. 또 은행에 우리 부부가 쓸 생활용돈 따로 늙어서 양로할 돈을 따로 충분히 저축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다행이도 아직까지 몸에 아무런 질병이 없이 건강해서 지금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날마다 한가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마음만은 평화롭지가 않다.

 

내가 바쁘게 달릴 때는 미처 몰랐는데 한가한 일상이 날마다 지속되면서 맛 좋은 음식에 양념이 빠지듯 나는 내 삶에 응당 있어야할 삶의 요소들이 많이 빠진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여태껏 나는 오직 내 가정을 위해서 내 인생의 봄과 여름을 보내며 살아왔지 진정 나를 위한 삶, 내가 응당 이루고 누리고 즐겨야 하는 꿈과 여러가지 특권을 모두 까맣게 잊고 오늘까지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젊어서부터 독서를 즐기고 글을 쓰면서 장차 훌륭한 작가가 되리라는 나의 꿈과 등산, 유람 등 여러가지 취미생활은 나도 모르게 진작 내 삶에서 사라졌고, 언제 한번 한가하게 하늘을 쳐다볼 시간적 여유와 꽃이 언제 피고 지고, 1년4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오늘의 자신이 진짜 자신이 맞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오죽하면 나이 60이 되도록 한 성에 살지만 매년 겨울이면 할빈에서 열리는 빙등구경 한번 못했고, 남들이 모두 갔다 오는 북경 유람도 나한테는 사치중의 사치였다. 결혼할 때 양복 한번 입어보고 지금까지 두 번 다시 입어 못 보고 장롱 속에 처박힌 지도 몇 십 년이 되니 더 말해서 뭣하랴. 말 그대로 지금까지 인생의 '맛 '이 무엇이고 인생의 '멋 '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 절로 나 자신이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왔다는 것이 너무 한심하게 생각된다. 특히 요즘 옛날에 나와 함께 문학을 하던 선배들과 후배들의 글을 여러 신문지상과 잡지에서 자주 접하고 그들이 출판한 소설집, 수필집, 시집을 볼 때면 그들이 그렇게 대견하고,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고, 부러울 수가 없다. 그때마다 '나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나?' 고 자문할 때가 많다. 저도 모르게 내 가슴을 칠 때가 많고 후회를 많이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 삶의 균형 잃은 삶을 살아왔다. 삶이 균형을 잃으면 항행하던 배가 균형을 잡지 못하면 전복되듯 내 삶이 균형을 잃었으니 지금 내가 매일 아무런 근심과, 걱정 없이 산다고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허허롭고 평화롭지 않아 삶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가을에 와서 후회와 늦었음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되며 나에게 아직도 여력이 살아 있고 꿈과 희망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을이 되면 철학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인생은 직장과 가정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일만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은 아닐 성싶다. 평생을 일만 하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면 우리네 인생은 삶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너무너무 억울하고, 불쌍하고, 잔인하고, 슬픈 인생이 아닐까?

 

인간은 오래 살거나 얼마나 많이 가지고 차지하느냐에 있지 않다.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다시 말해서 내 꿈, 내 소원, 내 취향을 찾아 성취하고 누리고 즐기며 기쁨과 행복을 찾고 최선을 다해 자기의 특성과 빛깔을 여한이 없이 빛내며 사는 것이며 삶이란 너무 한쪽으로 기우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고 사는 것이리라.

 

이젠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쉬면서 내 꿈과 취향을 찾아 남은 인생을 누리고 즐기면서 진정 나를 위한 삶에 시간과 정력을 할애하면서 살아가련다.

 

토닥토닥 비 내리는 날, 그리운 친구들에게 안부전화를 걸던가, 아니면 집에 불러 맛나는 부추전에 막걸리 한잔 마시며 덕담과 회포를 나누고, 은은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에서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고,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가씨처럼 호리호리한 몸매를 자랑하며 오가는 길손에게 인사를 건네는 길가의 코스모스에서 뿜어내는 아름다움과 향기를 맡는 '맛 '에 살고, 삼라만상이 잠든 새벽, 또는 밤에 조용히 책상에 마주 앉아 독서하고 글을 쓰며, 조깅과 문구도 치며 건강을 챙기고, 마음이 갑갑한 날에는 산을 찾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산수 좋고 경관이 좋은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다녀오며 견식도 넓히는 여유도 부리며 '멋' 있는 삶을 가꾸며 살아 갈 것이다. 물론 이웃들에게 사랑의 눈길과 따뜻한 마음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고 살 것이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가을부터 내 인생에 한 번 걸린 돌에 두 번 넘어지는 후회와 실수를 번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동안 잃어버렸던 소중한 나의 꿈을 되찾고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하나하나 찾아 누리고, 즐기며 가을의 진수를 보여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낙엽으로 살아갈 것이다. 아름다운 내 인생의 겨울을 만드는 가을을!

/수원시 허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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