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딸과 같이 집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구경 다녀왔다.
요즘 영화관들은 옛날처럼 수백 명 지어는 천여 명씩 앉을 수 있는 큰 장소가 아니라 수십 명이 앉을 만한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한 영화관에도 여러 개 객실로 나눠져 있어 부동한 시간대에 부동한 영화를 서비스도 차별화 되게 운영하고 있다. 연인들을 배려하여 소파를 둘씩 붙여 놓고 량 옆은 살짝 막아서 둘만의 공간을 즐길 수 있게 한 곳도 있고 좌석이 두개만 있는 VIP방도 있다. 량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추세로 발전하고 있다.
입체식 고급음향기기를 사방에 설치하여 은은하면서도 공간을 꽉 채우는 환상적인 소리는 관람객들을 황홀한 경지로 끌어들인다. 좌석도 폭신폭신하고 앉기 편안한 소파로 되여 있어서 일상의 피로를 소파에 기대여 풀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듯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요즘은 집에서 TV나 컴퓨터, 심지어는 핸드폰으로도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를 맘껏 감상할 수 있기에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적다. 하여 영화관 경영자들은 관람객의 취향을 고려하여 관람공간을 특별하게 꾸미지 않으면 관람객을 유치하기 어렵다. 영화관은 점점 질적 차원이 높은 문화생활을 즐기는 오락장소로, 연애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는 어쩌다 딸과 같이 영화관에 가도 절반시간은 졸다 온다. 폭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고 밀페공간에서 울려 나오는 은은한 선률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소르르 잠이 몰려온다. 그래서 딸한테 자주 놀림을 받군 한다.
딸은 내가 어렸을 때 영화 광팬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문득 영화에 미쳐 있었던 동년시절이 생각난다.
70년대 초 소학교에 다닐 때 나는 영화”귀신”이였다. 그 때 농촌에서는 각 촌마다 돌아다니면서 저녁에 영화를 상영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소학교마당에 기둥을 박고 영사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했는데 말 그대로 “로천영화관”이였다.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면 나는 해가 서산에 지기도 전에 쪽걸상과 땅바닥에 펼 보자기를 들고 “영화관”으로 뛰어 갔다.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람하기 좋은 위치에 보자기를 펴놓고 우리 가족이 앉을 자리를 미리 잡아 놓는다. 한 두 시간 후 부모님들이 일을 마치고 늦게 오셔도 딸 덕분에 좋은 자리에 앉아서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대부분 가정에서 모두 이렇게 자리 잡기 경쟁을 하였다. 영화상영 직전이면 서로 자기 가족을 찾느라고 목을 길게 빼들고 이름 부르며 소리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영화 광팬이었다. 학교에서 4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동네에 살고 있었지만 영화소리만 나면 엄동설한에도 빼놓지 않고 다니는 “개근생”들이였다. 우리 엄마는 하루 종일 일 밭에서 고되게 일하시고 저녁에 두부도 팔아야 했지만 영화구경만은 빼 놓지 않으셨다. 아마 고된 생활의 노고(勞苦)를 영화를 보면서 푸신 것 같다.
우리 집엔 아버지가 출근용으로 쓰는 영구패 자전거 한대가 있었다. 영화관람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자전거가 큰 몫을 한다. 자전거 앞 가름대에 나와 남동생이 앉고 뒤쪽 짐받이엔 막내 여동생과 엄마가 꼭 붙어 앉는다. 아버지는 다섯 명을 싣고 용하게도 자전거를 잘 타셨다. 영화가 끝나고 숱한 관중들이 밀물처럼 길에 몰려 나와도 자전거 방울을 울리며 재치 있게 사람들 속을 잘 헤쳐 나갔다. 우리 집 자전거부대가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우와~!”하고 환성을 올리며 감탄의 소리를 지르군 했다. 그야말로 자전거 서커스를 구경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자전거 한대에 가족을 가득 싣고 숨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아버지의 고된 인생을 방불케 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는 산처럼 든든한 존재였다.
아버지는 술을 자주 드시진 않지만 어쩌다 마시면 아주 기분 좋아 하셨다. 촌 기업에 출근하시는 아버지는 간혹 촌에 행사가 있어서 술 마시고 돌아오시는 날엔 온 집안에 웃음꽃이 떠날 줄 몰랐다. 평시엔 말수가 적으시고 우리 형제들과도 농담이나 장난 칠 줄 모르시는 너무 착하고 어진 분이다. 하지만 술만 드시면 기분이 180도로 바뀌어서 우리하고도 곧잘 장난치며 놀아 주시고 흥얼흥얼 노래도 잘 부르셨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환하게 웃는 모습은 술 마신 날에야 볼 수 있었다. 위로 늙으신 부모님에 아래로는 자식 넷을 둔 여덟 식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어깨에 짊어 진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겹게 사신 나의 아버지는 술에 의지해서야 잠시나마 정신적으로 해탈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내 나이가 그 때의 아버지 연세보다 더 많지만 지금도 내 머리 속엔 돈 때문에 남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서서 먼 하늘을 쳐다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영하 30도의 엄동설한에도 별들이 총총한 “노천영화관”에서 솜 외투를 끼워 입고 언 발을 동동 구르면서 벼 짚 깔고 앉아 영화를 보던 우리 가족, 집에 돌아와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 밤새도록 영화 속의 얘기로 웃음 꽃 피우던 초가삼간 고향 집, 그 때 그 시절에 영화는 우리 가족에게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었다.
요즘엔 궁궐처럼 화려하고 아늑한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봐도 동년시절에 느꼈던 영화에 대한 정열을 찾을 수 없다. 혹시 나는 어른이 다 된 지금도 영화를 보면서 잃어버린 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