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글짓기에 참가하여 상을 탄 학생과 학부형들이 고맙다는 인사의 전화가 걸려올 때거나 사업에서 가슴 설레는 일들이 있을 때마다 환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그 분은 바로 초중시절의 어문선생님- 윤룡범 선생님이다.
내가 윤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부터 거의 30년 전의 봄이었다. 그때 우리 학교는 현성에서 80여 킬로미터 떨어진 장백산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곳에 있었다.
작달막한 키, 다부진 몸매, 까만 머리, 짙은 눈썹 아래에 한 쌍의 정기도는 까만 눈, 첫 인상부터 깔끔하고 매력적이라는 느낌이 단번에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첫인사말부터 아주 청산류수처럼 잘하셨고 강의도 아주 잘하셨다. 하여 자석마냥 학생들의 마음을 끌었다. 반급의 많은 학생들은 어문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였고 어문시간을 보는 것을 아주 즐기게 되였다. 어문시간이 끝나기 바쁘게 선생님한테 달려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말을 건네기도 하였다. 어문시간이 끝나면 못내 아쉬워하면서 다음번 어문시간을 기대하군 하였다.
선생님은 글짓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쓰신 많은 글들이 신문, 잡지에 육속 발표됐다. 선생님께서 오신 이후로 자그마한 향진학교의 이야기가 신문 지상과 방송전파를 통해 세상에 널리널리 알려졌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시간에 가담가담 글짓기지식을 가르쳤다. 단어 모으기, 자료수집, 글감 고르기, 글 수정, 취재 …등등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기 쉽게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의 서재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책들이 아주 많았다. 또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한 책들도 수두룩하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선생님의 호주머니에는 늘 작은 노트와 필이 자석처럼 붙어 다녔다. 무릇 어디선가 새로운 단어를 들으면 인차 노트를 꺼내서 적어놓군 하시였다. 또 발표된 작품은 가위로 곱게 베여서 커다란 노트에 차곡차곡 붙이셨다. 그리고는 발표된 작품의 출처와 날자까지 또박또박 적어놓군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한편의 작품도 빠짐없이 모두 붙이셨는데 그 작품집은 선생님께서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이였다.
선생님께서는 일년에 두 번 정도 야외에서 수업을 진행하셨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과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이면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데리고 야외로 자연관찰을 떠나셨다. 가끔은 시냇가에도 가고 가끔은 단풍이 든 산야를 거닐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자연을 마음껏 감수하고 자기의 감수를 마음껏 토로하게 하였다.
그때 우리 반 애들은 선생님을 많이도 따라했다. 책에서 좋은 구절을 보면 제꺽 정리해서 노트에 적고 기억하였다. 또 과임선생님들의 강의도중 좋은 어구가 나와도 놓칠세라 인차 적어넣군 하였다.
또 신변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일들은 제때제때에 쓰기 시작하였다.
선생님은 강의하실 때는 박사 같고 범독을 하실 때에는 아나운서 같았으며 글짓기를 하실 때에는 작가 같았고 채방을 다니실 때는 기자 같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정말로 우리 민족의 언어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그이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학생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래서 오늘 날까지도 잊혀 지지 않고 더더욱 오래오래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