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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철이 없던" 그 시절을 그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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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02-18 21:48 조회6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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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의 별명은 나의 이름 뒤에 없다가 달렸다. 즉 영, “철이 없다” 이다.

 

내가 큰 사고를 치를 때마다 마을의 어른들께서는 영, 철이 없는 저 자식이 사람 될 날이 있을까? 라는 걱정이였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범이 새끼를 세 마리 낳으면 시라소니 한 마리 있다더니 귀신도 눈이 멀었는지 저런 시라소니를 잡아가지 않고 ...

 

그때 난 어머니가 계모 아닌가고 사촌누나한테 물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욕이 하나도 과하지 않다.

 

어머니께서 나의 동생 넷을 잃은 시기에 내가 큰 사고를 저질렀으니 그런 욕을 먹어도 싸다. 참 한심했다. 내 밑의 여동생 영옥이가 다섯 살에 홍역으로 죽은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큰 사고를 저질렀다.

 

마을 뒷산 아래쪽은 강파르지 않아 겨울마다 애들이 썰매를 타는 자연 썰매장이였다. 그래서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았다.

 

봄이면 애들이 거기에서 돌 굴리기 놀음을 하곤 했다. 큰 돌은 그전에 다 굴려 작은 돌을 굴리자니 재미가 없었다.

 

그때 나의 눈에는 마을 아래 집의 소수레가 들어왔다. 저 수레바퀴를 빼 굴리면 어때?

 

애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그 집 헛간에서 연장을 찾아 낑낑대며 수레바퀴를 뽑아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양 옆에서 잡고 산중턱 까지 올라갔다.

 

그때 우리 나이는 일곱 살도 안됐다.

 

나의 구령에 따라 수레바퀴를 놓으니 멋있게 굴렀다. 마을길을 지나 논이 있는데 수레바퀴는 용케 논두렁 두 개를 넘어 세 번째 논두렁에 부딪치며 박살났다.

 

우리는 환성을 올렸다.

 

바로 그때다. 그 집 주인이 나타났다. 우리를 붙잡은 그 분은 제일 먼저 나의 집으로 끌고 갔다.

 

최 촌장 아들 교육을 잘하란 말이요. 수레바퀴 값을 내놓으란 말이요!

 

어머니께서는 농 안에서 돈을 꺼내 그 분한테 주면서 연신 사과하셨다.

 

그 다음은 어머니의 물매가 뒤 따랐다.

 

두 번 째 큰 사고는 내 아래 남동생 영환이가 죽은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또 발생했다.

 

나의 남동생은 아버지를 닮아 나와 형님과 달리 또래들 가운데서 키가 제일 컸고 곱슬머리에 부리부리한 큰 눈, 조금 걀죽한 하얀 얼굴에 빠진데 없는 미남아였다. 마을의 어른들은 손에 먹을 것이 있으면 걔에게만 쥐어줬다.

 

자식이 없는 한 집에서는 어머님 보고 걔를 달라고 했다. 그때 나를 달라고 했으면 바로 수락하셨을 것이다.

 

그런 아들을 잃으신 어머니의 심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 것도 모른 내가 시라소니 욕을 먹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수레바퀴 사고 후 나는 다른 장난에 또 정신이 팔렸다. 즉 돌팔매질이었다. 20미터 떨어진 곳에 물병을 놓고 돌을 뿌려 명중하는데 골똘했다. 우리가 여러 날 놀다보니 명중률은 현저히 높아졌다.

 

그런데 이 장난이 또 큰 화를 불러올 줄이야.

 

당시 마을의 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적어 4학년까지밖에 없어 5학년부터는 현성에 있는 조선족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나보다 세살 더 이상인 선배가 현성 학교를 다녔는데 토요일에 집에 왔다가 일요일에 현성으로 갈 때 난 낚시를 사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날 골려주면서 앞으로 냅다 뛰었다.

 

네가 뛰어?! 오늘 내 손맛을 봐라. 나는 주먹만큼 큰 돌을 주어 뿌렸는데 바로 그의 뒤통수를 맞혔다. 당시 나는 대만족을 느꼈다. 나름대로는 내가 너무나도 명중을 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잠간의 희열, 다시 그를 쳐다보는 순간 그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이 사고는 작은 사고가 아니었다. 어머니께서는 또 돈을 들고 가서 사과하셨다. 집에 온 나는 또 물매를 면치 못했다.

 

지친 어머니께서는 죽은 아들을 부르시며 통곡을 하신 끝에 시라소니 욕을 하셨다.

 

세 번째 큰 사고는 막내 여동생 정순이가 죽은 후 반년 만에 발생했다.

 

그때 다른 애들은 나무권총을 만들어 갖고 놀았었는데 나는 화약권총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검은 성냥과 흰 성냥이 있었다. 검은 성냥 한곽의 화약을 빼내 쇠파이프로 된 총신에 다져 넣고 종이로 틀어막은 후 작은 연 탄알 십여 개를 넣고 종이로 막는다. 총신 뒤 부분 위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곳에 흰 성냥 화약 한 알 놓는다. 다음 그 곳을 내리치는 격침이 연결된 방아쇠를 당기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연 탄알이 날아간다. 뒤따라 앞에 있는 물병이 박산난다.

 

이 권총이 또 큰 사고를 치게 된 것이다.

 

당시 겨울에 현성에서 탕후루 장사꾼이 자주 마을로 찾아왔다. 나이는 스무 살 좀 안 되는 청년이었다.

 

하루는 내가 또래들을 데리고 그 장사꾼한테 가서 탕후루를 주지 않으면 총을 쏜다고 했다. 그러자 나무권총으로 알고 있던 그 청년은 쏘겠으면 쏘라고 했다. 그러자 나는 그의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총을 쐈다. 총알이 그의 탕후루로 날아갔다. 탕후루 10여 가지가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마을 사무실로 끌려가 탕후루 값을 치렀다.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물매를 면치 못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생각 밖으로 어머니께서는 눈물만 흘리셨다.

 

그때 나는 속으로 결심했다. 다신 못된 장난을 하지 않겠다. 다시 그러면 사람이 아니다. 그때로부터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장난에 할애하던 시간을 공부에 돌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자식 다섯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7년 전 내가 작은 아들을 잃은 후에야 나는 어머님 고충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는 일흔 고개를 넘지 못하고 암 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그때 나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영, “철이 없이” 놀았던 나 때문에 암 병에 걸려 세상을 뜨셨다고 말이다. 그러나 불효자가 운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래도 나는 어머님께 고하고 싶다.

 

어머님 제발 용서 하시옵소서!

못난 이 자식을!

 

못난 아들 최영철이 이런 글을 올립니다.

/부천에서 최영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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