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방황
문걸은 춘희 의사와 등산하러 갔다가 눈 구렁텅이에 빠져 고생하며 사랑을 무르익혔던 정경을 회억하면서 국제미술작품전시회에 내놓을 유화를 그렸다.
붓끝이 훨훨 춤추며 휘날리는 손길을 따라 명암과 색조가 선명한 멋진 그림 발을 펼쳐갔다. 철갑을 두르고 하늘을 찌르며 서 있는 미인 송, 훤칠한 미인 송과 푸르른 소나무가 서로 타래 치며 꽉 포옹하고 쌍무를 추는 상 싶다.
협곡에서 불타오른 불길이 부둥켜 안은 미인 송 신사와 소나무 미녀를 명암이 분명하게 비춘다. 그 미인 송과 소나무 몸에 신사와 미녀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 미인송인과 소나무인은 문걸 본인과 춘희의사를 상징했다.
인면목신(人面木身)의 환상적인 미술작품이 완성돼갔다. 아니, 사랑의 환상적인 명화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불길”, 그 유화는 환난 속에 맺어진 그들의 지고무상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명화였다. 송진처럼 엉켜 붙은 사랑의 추억으로 재탄생한 명화였다.
문걸은 그 유화를 촬영해 대형복제기로 복제해냈다.
똑, 똑, 똑.
뜻밖에도 춘희의사가 찾아왔다.
그녀는 유화를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아니, 끝내 그려냈군요.”
문걸은 소파에 자리를 권하면서 정색했다.
“어떻게 험난한 곤경을 겪으면서 착상한 유화요. 꼭 기념품으로 그려서 춘희박사한테 드리고 싶었습니다.”
“호호호. 기념품 참 감사해요.”
그러나 춘희는 속으로 피뜩 이런 생각이 번개 쳤다.
(이렇게 품 들여 이 그림을 그리다니? 아직도 내게 미련 있는가?)
그녀는 소파에 앉지도 않고 유화 곁에 가 찬찬히 감상하면서 연신 감탄했다.
“리 선생님의 유화 착상을 알고 봐 그런지. 아주 멋져요. 여기 소나무껍질을 휘감은 미인 송과 소나무는 의경도 짙고 의미심장해요. 그런데 이 두 인물은 너무 젊은 것 같은데요. 기념품이 되자면 그래도 실제 형상과 맞아야 되지 않는가요?”
문걸은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유화는 그때 당한 곤경이 남긴 기념품입니다. 유화도 예술작품입니다. 그때 장백산 협곡 눈구덩이에 빠진 정형은 생활의 진실입니다. 그러나 예술은 기념품이나 생활의 진실을 반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진실을 예술의 진실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활정형 진실 그대로 옮겨놓으면 예술의 매력을 잃게 됩니다. 물론 그때 정형 자체가 아주 돌연적인 뜻밖의 사고이기에 그 자체가 아주 렵기적이고 기이하고 신기할 순 있습니다. 그대로 그려도 인기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시나 소설이나 유화나 사실 진실 그대로 보여주면 예술이 아닙니다. 굴절을 통한 예술적인 재가공을 해서 보여줘야 된다고 봅니다.”
춘희는 혀를 끌끌 차며 찬탄했다.
“네- 아주 깊은 유화예술 일가견이군요. 잘 들었습니다.”
“아니, 유화예술에 대해 천박한 견해를 말했을 뿐입니다.”
“유화예술을 모르면서 횡설수설해 미안해요.”
“아니, 김 박사 견해는 객관적이고 통속적인 평가입니다. 본대로 지적해주십시오. 저에겐 보귀한 참고자료로 될 수 있습니다.”
“저기 등장한 인물은 너무 젊은게 아닌가요?”
“청춘남녀로 그려야 인기 있을 것 같아 살짝 젊은 남녀로 고쳤습니다.”
“네- 그렇지만 어쩐지 황혼남녀로 그리면 여운이 더 길 것 같아요.”
“네?”
춘희는 자못 정색했다.
“물론 청춘남녀로 그리면요. 얼굴도 예쁘고 보기는 좋을 거죠. 그러나 황혼남녀로 그리면요. 더욱 매력이 있을 것 같아요.”
“오- 무엇 때문입니까?”
“언제부터 리선생님은 저와 ‘예’, ‘예’ 하면서 존대를 쓰기 시작했습니까? 퍽 멀어진 거 같아 서운해요.”
“그래요? 그럼 어투를 고쳐야지. 계속 금방 하던 말 해보오.”
그제야 춘희는 해맑게 미소 지었다.
“황혼 중노년으로 그리면 황혼기에 처한 중노년들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 황혼련에서 부딪친 난제를 암시하는 것 같아 퍽 매력이 있을 것 같아요. 여운도 남고요.”
“오-“
문걸은 머리를 끄덕였다.
춘희는 만금이 가져온 커피 잔을 들고 호호 불어 마시면서 화실의 벽에 줄느런히 그려놓은 유화를 둘러보았다. 그는 유화 속에서 베일에 가려진 침대에 누운 자기, 소파에 앉아 커피를 호호 불며 마시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한숨을 호 내쉬었다.
눈치 챈 문걸은 그 두 벽화를 벽에서 떼 내렸다.
“집에 돌아갈 때 기념품으로 가져가오.”
“네? 아니, 이전에 준 게 있는데요.”
그러나 인차 말을 바꿨다.
“알았어요. 화실 벽이나 차지했지. 가져갈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화실에 일이 생겨서…”
춘희는 유화도 벽에서 뜯어 내리웠고 숱한 짐을 싸놓은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아니, 이 짐은?”
문걸은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이사 짐이요.”
“녜?”
춘희는 더욱 의아해했다.
“이 좋은 화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문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내가 죽고서야 화실을 해 뭘 하겠소?”
춘희는 대뜸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일편단심 조강지처를 생각하는 마음 진짜 감동입니다. 건데 화실까지 팔고 허망 나앉겠습니까?”
춘희는 문걸이 조강지처가 앓자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조강지처에 대한 동정을 훨씬 초월해 몇십년 동안 동고동락한 진지한 사랑과 감정이라는 것이 천천히 안겨왔다.
문걸은 춘희를 마주 보며 정색했다.
“화실을 팔아서라도 영희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화실을 판다고 구할 수 있겠습니까? 치료비가 문제 아닙니다. 우린 의료과학을 믿고 랭정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영희 환자의 병세는 아주 중해요.”
문걸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래? 영희 병세 어떻소?”
춘희는 극구 진정하면서 말했다.
“코로나는 치료됐어요. 그러나 후유증은 주의해야 해요. 목이 캐하거나 기침이 자꾸 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상상 밖의 코로나 후유증도 올 수 있습니다.”
“오- 감사하오. 그 놈 코로나에 걸리지 말아야지.”
“일단 한번 걸리면 오래동안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유럽의 일부 나라들에서는 방역통제를 포기하고 활 풀어놓았는데요. 과학적이 되지 못해요. 백성들의 방역과 건강을 완전히 책임지지 않는 행위입니다.
미국을 졸졸 따라다니는 일부 나라들도 미국 방역포기를 무조건 답습해 그대로 하는데요.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루에 몇십만명씩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병원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숱한 코로나환자들이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집에서나 길거리서 죽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백성들이 코로나에 걸리겠으면 걸려랴. 죽겠으면 죽으라. 나머지 살면 된다. 이런 태도입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무슨 자유요, 민주요. 인권이요 하면서 국가에서 방역규제를 하는 것을 반대해 시위까지 하죠. 심지어 마스크를 쓰라는 걸 반대해 시위행진하고 경찰들과 충돌하죠.”
문걸도 한마디 동을 달았다.
“글쎄 말이오. 미국 백성들은 어떻게 살겠소? 한국도 그러더구만.”
춘희는 정색했다.
“그래요. 그래서 한국 일부 언론에서 정치방역을 한다고 비판하고 있지요. 한국에서는 방역규제를 풀지 않으면 소상공인들이랑 가게에서 영업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살기 어렵게 되지요.
정치적 영향도 크구요. 게다가 한국에서 소상공인들의 엄청 많은 영업 손실을 배상해주려면 재정 곤난이 생길 수도 있지요. 심지어 나라의 정상적인 경제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죠.”
“오- 그래서 한국에서 아예 방역규제를 활 풀어놓았겠소.”
“네. 그래요. 한국에서 방역규제를 활 풀어놓아 큰 걱정거리입니다. 글쎄 3분의 1되는 한국 사람들이 거의 다 코로나에 걸리게 된 거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코로나를 이젠 유행성감기처럼 대수롭잖게 여기죠.”
춘희는 프롤로그가 너무 넓게 나간 것 같았는지 화제를 영희의 치료에 돌렸다.
“영희를 살리려면 의료과학에 의거해야 합니다. 코로나는 이미 치료됐기에 이제 암을 치료하면 됩니다. 결과는 어떨는지 몰라도 저와 선희 박사는 최선을 다 할 겁니다. 근심하지 마세요. 화실은 놔두세요.”
순정의 충고에 문걸은 중얼거렸다.
“영희를 살려내면 화실이라도 팔아 은공을 갚겠소.”
“그런데요…”
“뭐요?”
“암세포가 전신에 퍼져서 치료하기 힘들어요.”
“아니, 방사선치료나 화학치료 하면 안 되오?”
춘희는 만금이 건네는 커피 잔을 들어 후- 후- 불면서 말했다.
“방사선이나 화학 치료를 너무 많이 하면 환자 신체가 받아 당하기 힘들어요. 환자가 구토하구 설사 심해 견디기 힘들어요. 어떤 환자들은 방사선치료와 화학치료 견디기 힘들어 막 자살까지 합니다. 방사선치료는 암세포를 죽이지만 몸에 좋은 세포도 죽입니다. 좋기는 자체면역력으로 환자가 암 병을 이기는 것이죠. 그런데 환자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안돼요.”
“다른 방법이 없소?”
“계속 방사선치료를 하고 항암 약을 복용하는 외에는 다른 수가 아직 없습니다. 우린 이제 우리 중국의 선진적이고 전통적중의학과 미국과 일본 서양의 항암 약을 결합해 치료할 겁니다. 또 유럽에 가서 배운 줄기세포학을 이용해 암세포를 제거하는 한편, 클론복제기술을 이용해 암세포가 퍼진 영희 환자의 장기를 복제해 이식할 겁니다. ”
문걸은 눈물이 글썽해 춘희의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춘희의사, 대장암도 치료해 날 살려내지 않았소? 춘희박사 의료재간을 믿소. 꼭 영희를 살려주오.”
“네- 노력하지요.”
춘희는 간판을 보고 의아해했다.
“보름달빛음악술집? 이젠 화가를 그만두고 술집을 차릴 예산인가요?”
“아니오. 처형이 간판을 부탁해서 만든 거요.”
춘희는 씨무룩이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렇겠죠. 화가를 그만둘 리 선생님이 아닌데요."
“배운 게 그림인데 그만두다니요?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림이야 그려야지.”
똑, 똑, 똑.
뜻밖에 이번에는 순정이 들어섰다. 그녀는 집 안에 들어서자 춘희의사를 보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영희 치료의사 아닌가요? 감사합니다. 영희 코로나를 치료하느라고 수고 많았습니다. 암 병도 잘 치료해 살려주십시오.”
순정은 뮤뮤 핸드백에서 비취목걸이를 꺼냈다. 뮤뮤 핸드백은 이딸리아 명품 핸드백이다. 그 뮤뮤 핸드백은 이탈리아로 관광 갔을 때 정호가 거의 2500딸라나 주고 순정한테 이탈리아 관광기념품으로 사준 것이었다.
“자, 받으세요. 춘희선생님은 영희 구명은인인데요. 자그마한 성의라도 받아주세요.”
춘희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이러지 마세요. 환자를 구하는 것은 우리 직책입니다.”
“아무런 부담 갖지 마세요. 살려내지 못해도 은공은 꼭 갚고 싶습니다.”
춘희는 문걸을 건너다보았다.
“받소. 처형 성의를.”
“이제야 인사하는데요. 이전에 제가 궁외임신 했을 때도 황선희 의사하구 춘희의사 수술해 줘서 살아났습니다.
그때 중약으로 긁어버리려다가 하마트면 큰 일 날번 했습니다. 글쎄 온 몸에 자주색반점이 다닥다닥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수술해 떼 버렸으니 망정이지. 자주색반점이 그대로 옴 몸에 잦아들어 남아 있으면 어쩝니까?”
춘희의사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황송합니다. 수술은 황선희 의사가 주도해 했습니다. 저는 협조했을 뿐입니다. 자주색 반점은 그때 중의과에서 중약으로 해독해 없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절대 수술과는 관계없습니다.”
“아무튼 남의 성의를 받아야죠. 그렇잖으면 속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순정은 기어이 비취목걸이를 밀어주며 정색했다.
“일본문화에 푹 물젖은 사람입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걸 받지 않겠습니다.”
춘희는 기어이 받지 않았다. 7년 동안이나 일본에 류학을 가 있었기에 뭐나 AA방식을 선호하였다. 그녀는 아무에게서나 공 선물을 받기 싫어했다.
특히 환자가속에게서 례물 같은 것을 받는 것을 최대의 수치로 여겼다. 의료도덕에 어긋나니깐. 또 살기 힘들어 금품을 받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때문에 순정은 은공을 갚느라고 주었지만 춘희는 오히려 좋아하지 않았다. 혹시 영희 치료 때문이 아니면 몰라도.
잘 알지도 못하는, 큰 인연도 없는 순정한테서 선물을 받으려고 하겠는가. 거부감부터 앞섰다.
그렇다고 춘희는 제 털을 뽑아 제 구멍에 꽂는 그런 부류 여자는 아니었다. 베풀기는 좋아했다. 문걸이 앓을 때에도 그녀는 서슴없이 자기 카드를 긁어 치료비를 선대해주었다. 그녀는 베풀기는 좋아하고 받으려고 하지 않는 성격 특징이 있었다.
그녀는 어색한 기분을 돌리려고 눈길을 유화와 간판에 돌렸다.
“아니, 진짜 명화군요.”
문걸이 그 유화를 그리게 된 계기와 착상을 잘 알고 있는 춘희는 감상이 남달랐다. 공명과 감탄이 끊임없었다.
순정은 유화를 피뜩 보고 이상해 했다.
“어머, 세상에. 몸에 소나무껍질을 들쓴 녀자도 있는가요? 남자는 미인송에 그려졌군요. 신기하긴 해요.”
문걸은 복제품을 순정의 앞에 내 보였다.
“똑 같네요. 진짜 신기해요.”
“이 유화를 보름달빛음악술집에 가져다 벽화로 거오.”
“와- 대박이네요. 감사해요. 생원! 어, 아니, 리선생님. ”
그녀는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벽화와 간판 참 멋지군요. ‘보름달빛음악술집’’, 참 글자도 멋지게 새겼습니다. 감사해요. 이제 리선생님 필치대로 간판에 금박 칠을 해야겠습니다.”
“옳소. 그러면야 더 멋지지. 내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만.”
문걸은 순정을 보고 정색해 물었다.
“처형, 어째 음악술집을 보름달빛음악술집으로 달았소?”
순정은 자기 보름달얼굴을 식지로 가리키며 갸웃했다.
“제 얼굴을 보세요. 뭐 같은가.”
“오- 알만하오. 그래서 보름달빛음악술집으로 달았구만. 참 아름다운 상징의미 있소. 간판부터 의경이 은은하게 짙소. 허허허.”
순정은 아양을 떨었다.
“우리 음악술집에 함께 자주 오세요.”
순정은 춘희와 문걸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반초청했다.
춘희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문걸은 흔쾌히 대답했다.
“꼭 가지. 영업 시작하면 춘희의사하구 사교무를 추러 가겠소.”
“대환영! 리선생님과 김박사녀사께서 오면야 우리 음악술집의 영광이죠.”
문걸은 화실 벽에 걸어놓은 유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처형, 저기 유화 몇 장도 가져다 벽화로 걸어놓소. 분위기 맞을 거요.”
“어마나! 대박! 이 은공을 어떻게 갚으면 좋을가요?”
“은공은 무슨 은공. 오고 가는 정이지.”
순정은 소파에서 일어나 문걸한테 허리 굽혀 곱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아직도 처형으로 생각해줘 고맙습니다.”
그녀는 벽화 앞으로 다가가 음악술집 벽화로 어느 유화가 어울리겠는가고 일일이 꼼꼼히 살펴보았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라체 미녀가 물동이를 어깨 위로 기울여 물을 쏟아붓는 유화를 보고 순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 두 그림 가져다 걸지요.”
“가져가오.”
“고맙습니다.”
그러나 순정은 젊은 남녀가 부둥켜 안고 사교무를 추는 유화 앞에서 주춤 멈춰 섰다. 음악술집에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데 딱 자기와 정호 사교무를 추는 장면 같았다.
언젠가 문걸은 사교무장에서 정호와 그녀가 사교무를 추는 장면을 보고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오래동안 기별 없었는데 여기에 걸려 있지 않겠는가.
순정은 홱 돌아서 문걸한테 물었다.
“이건 누굴 모델로 그린 건가요? 당장 떼버리세요. 아니, 없애버리세요.”
‘어쨌다고 그러오?”
“당장 정호하구 이혼하겠는데 그 놈과 춤 추는 그림 어떻게 벽화로 걸어요. 남들이 보면 웃길 일 아닌가요?”
문걸은 소파에서 일어나 씨무룩이 웃었다.
순정은 보름달얼굴에 의혹이 꽉 차가며 쌍까풀눈을 치떴다.
“그럼 저 남자 모델 정호 아니고 누군가요?”
“정호 아니오. 내 아들 군철 하구 며느리 춤추는 장면인데.”
“오- 그래요? 딱 정호 같은데.”
“군철인데 정호 같다구?”
순정은 이렇게 토설하고 싶었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이제야 알았습니까?”
그러나 용케도 참고 문걸의 눈치만 살폈다.
“아니, 그게 정호로 보이오?”
“그럼 생원은 군철로 그린다는 게 정호를 그렸는가요?”
“군철도 이젠 이혼했으니깐. 저 그림을 없애는 건 옳은 것 같소. 음악술집에 건 걸 알면 며느리 좋아하겠소?”
문걸은 추억에 잠겨 말했다.
“이전엔 아들과 며느리 이 유화를 보고 아주 기뻐했소. 상해 한국 기업년말총화 때 총경리 요청으로 아들과 며느리가 사교무를 춘 적이 있소. 그때 그 장면을 보고 내가 이 그림을 그렸지. 아들과 며느리는 자기들을 모델로 그렸다고 아주 좋아하면서 자기 집에 걸어두었소. 저건 복제품이오.”
순정은 눈치 무딘 문걸을 보고 코웃음 쳤다. 그녀는 돌아서서 숱한 보짐을 보고 의아해 물었다.
“리 선생님, 어째 이사하자고 그래요?”
문걸은 그저 묵묵부답했다.
이때 또 미녀로봇이 끼어들었다.
“네. 화실을 팔아서 조강지처 치료비를 댄다고 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순정은 눈이 데꾼해졌다.
“영희 때문에 화실까지 팔 필요는 없습니다.”
문걸은 춘희를 힐끔 보며 말했다.
“글쎄 말리는 사람 한둘이 아니오. 허나 어찌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치료비도 푼푼히 안 대준단 말이오. 필경 영희는 오누이를 낳아준 조강지처 아니고 뭐요?”
순정은 바보 같은 문걸을 속으로 웃고 또 웃었다.
(언젠가는 눈치 채겠지.)
문걸은 순정을 도와 벽화를 오디 차에 실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영업 시작하면 잊지 말고 오세요.”
“그러지.”
문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순정한테 나직이 말했다.
“정호, 그 나쁜 놈 주의하라고 하오. 언제 꼬리 밟혀 감옥 갈지 누가 아오?”
순정은 눈을 찔끔하더니 식지를 빨간 입술에 갖다 댔다.
(에구, 불쌍한 생원이, 누구 걱정 말고 집 안 불이나 잘 살피오. 내 정호하구 군철이 머리털을 뽑아뒀소. 이제 유전자검증소에 가져다 검증하면 모든 게 밝혀질게오. 정호, 그 나쁜 놈새끼 문걸한테 죽는 거 어떻게 보겠니. 흥!)
이윽고 오디차는 숱한 명화를 싣고 천천히 미끌어져 갔다.
문걸은 순정을 보내고 화실에 돌아와 춘희와 마주 앉았다. 오늘 따라 춘희는 인차 자리를 뜰 예산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을가?)
문걸은 춘희와 마주 앉아 만금이 차탁 위에 가져다 놓은 녹차 잔을 들어 마시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춘희는 문걸의 수심에 잠긴 길죽한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문걸은 군철과 며느리가 사교무를 추는 장면을 그린 유화를 물끄러미 보며 영희를 두고 방황하며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순정의 말처럼 저건 군철인지 정호인지 분간하기 힘들잖은가? 왜 여짓껏 눈치 채지 못했을가? 그럼 군철은 순정의 계시처럼 정호 아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인차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그럴 수 없어.”
문걸은 어망 결에 한마디 했다.
“뭘 말인가요?”
춘희가 의아해 물었다.
“어, 아니, 아니오.”
문걸은 계속 속궁리를 돌렸다.
(영희는 나 하구 망아산에서 처음 그래서 딱 열달 만에 군철을 낳았어. 젤 처음 그럴 때 확실히 빨간 매화꽃을 피웠댔어. 그날 팬티에 분명 빨간 매화꽃이 묻어 있었댔지.)
그러나 문걸은 또 이상한 놀라움과 의혹이 외까풀에 비꼈다.
(처음 영희하구 그럴 때 빳빳한 감이 덜 났어. 아니, 헐렁한 감이 들었지. 쉽게 그녀 몸속에 들어간 느낌이 있었어. 그때 부지중 ‘왜 이렇게 헐렁해’ 하고 영희를 활 밀어 놓았지. 그러자 영희는 인차 화를 내지도 않았어.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지. 그저 돌아누워 흑흑 흐느끼면서 가녀린 어깨를 들먹였지. 억울하면 왜 항변하지 않았을까? 너무 억울해서? 억이 막혀 말하지 못했어? 아님, 아픈데 찔려서 울었어?’)
문걸은 의혹에 의혹의 꼬리 더 길어지는 것을 느꼈다.
(후에 의심스러워 왜 그게 그렇게 헐렁한가? 자꾸 따지고 드니 한다는 말 웃겼지.
‘그게 헐렁하지 않으면 애 대가리 다 드나들겠소?’
당시 논쟁도 끊임없었지.)…
(‘그래도 그렇지. 숫처녀면 아파서 비명도 지를텐데. 아무 소리 없었어. 내 그것도 거침없이 들어가더라.’
‘꽤나 경험 있는 소리군요. 그래 내 먼저 숫처녀 몇이나 겪어봤는가요? 그렇게 아는 소릴 쳐요?’ ‘지금 날 의심하오?’
‘자꾸 날 의심하니 자연히. 흥.’
‘묻는 말이나 하오. 그때 내 허망 덮쳐들어 빗나가니 당신 뭐라고 했소?’
‘아래쪽으로 그래라. 안 그랬어.’
‘그래, 허망 막대기질 하는 거 어쩌는가요?’
‘아주 경험 있는 여자로 보이던데. 체위도 반듯이 누웠지.’
‘그래, 반듯이 누워 있은 것도 죈가요? 진짜 의심 많군요. 당신은 경험 없는 남자였구만. 우에 척 달려들어 아주 능란하게 요동치더구만요. ㅎㅎㅎ.’
‘그게 타고 난 본능이지. 누가 배워줘서 알겠소?’
‘당신은 본능이구. 전 경험이겠군요. 왜 그렇게 짝 시비해요?'
‘그럼 숫처녀란 거 증명해보오.’
‘그날 저의 하신에서 뭔가 동무 그게 들어오는 걸 저애하는 뭣이 있는 감을 느꼈어요. 뒤이어 쨍 하고 아픈 감이 났지요. 그날 망아산 방공 굴에서 그럴 때 당신이나 내나 서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요.
후에 팬티에 그게 묻었더라고 동무도 말하지 않았는가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방공 굴도 알겁니다. 나무에서 우 짓다가 놀라 날아난 새들도 알거예요. 우리 그러는 거 보고 깜짝 놀라 나무에 쪼르르 바라 오르던 다람쥐도 기억할거요.’
‘쳇, 아주 듣기나 좋은 동화변명을 늘여놓는군. 그게 위생기 그거라면?’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럼 화실에서 그럴 때도 위생기 그거였는가요? 생각해보세요. 그때 두 번째였는데요. 그때도 그게 몽땅 파열되지 않아 재차 파열되면서 피가 흐른 거죠. 그땐 동무도 그걸 보고 침대보를 쳐들고 ‘빨간 매화꽃이 피였구나! 난 숫처녀한테 장가들었다!'고 고함까지 치지 않았는가요?’
‘그건 그랬지.’
‘어때요? 이젠 제가 숫처녀라는 걸 인정하겠는가요?’)
문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 후 딱 열달 만에 문걸을 낳았다. 그때부터 문걸은 다신 영희를 의심하지 않았다.
문걸은 깊은 추억에 잠겼다가 깨여났다.
(그런데 확실히 군철은 정호를 딱 떼 닮지 않았는가? 군철은 어려서 양고기 뀀을 얻어먹는 멋에 날 졸졸 따라 다녔지. 어떤 때엔 점심에 영희와 만나 부부생활 해야겠는데 군철이 떨어질 줄 몰랐지. 그래서 용돈을 줘서 양고기뀀 사 먹으로 가라고 얼려 내보내고 재미를 본 적도 있었지. ㅎㅎㅎ.
그런데 그 놈 학부형회의에 갔다가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졌을 줄이야. 귀쌈 한대 쳤다고 집에서 도망쳐 밤중에도 돌아오지 않았지. 그래서 영희하구 둘이 온 시내 다 찾아다녔지만 못 찾았지. 밤중에 군철이 친구 집들에 렴치 잃고 전화해도 없었지.
그래 속을 태우는데 밤 12시 넘어 돌아왔지. 그 추운 겨울에 대여섯 시간이나 어데 가서 있었 는가고 후에 물어보니 시내 다리에 가서 떨어져 죽을가 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 말 듣고 우린 깜짝 놀랐지. 다행히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음이 깔렸더란다. 그래서 다리에서 떨어지면 아플 것 같아 내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얼마나 위험했어? 군철은 살아 돌아왔지만 그 후부턴 나하고 삐졌지. 내 말을 잘 듣지 않고 에미 말만 들었지. 나이 들수록 나하고 더 멀어졌지. 나이 먹으면 괜찮겠지 했는데 그때 한대 맞은 마음의 상처 얼마나 컸는지, 곬이 얼마나 깊었으면 내내 외우면서 날 욕했지. 내 뭐라면 꼭 반대했지. 항상 엄마 편들어 날 공격했지.)
문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래두 내 그림 판 돈으로 한국 견습도 보내고 고중 졸업 전에는 미리 살 곳을 봐두라고 북경, 위해, 청도, 연태, 상해, 남경, 소주, 항주까지 데리고 다녔지. 그런데 에미하고 이혼하니까. 날 집안 호적에서 영원히 긁어버리겠다고 까지 하지 않았는가. 무정한 놈, 네놈새끼 진짜 순정이 말처럼 정호 새끼냐?)
그는 도리머리를 홰홰 저었다. 군철이 의심스럽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군철이 진짜 정호 아들이라면 모든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게 번져 질 것이였다. 자기는 홀 애비 신세에 살상가상으로 대가 끊어지지 않겠는가. 그보다도 정호와 영희한테 한뉘 속히워 산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 새끼마저 남의 새끼라면 이 세상은 허위로 꽉 찬 세상 아닌가, 그럼 이 세상에서 무슨 살 멋이 있는가? 차라리 훌 자살해버리면 모든 게 끝인데. 홀가분하게 해탈될 것인데…)
문걸은 자기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새삼스레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인차 자기 의심을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야,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어. 호랑이처럼 못된 영희가 정호한테 정조까지 바쳤겠어. 정호 앤 걸 알고 낳기까지 했겠어? 아직 아무런 근거도 없잖은가. 물론 군철은 날 닮지 않았지. 그러나 아들은 에미를 닮고 딸은 애비를 닮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예를 봐. 날 닮지 않았어? 외까풀눈이랑 얼마나 매력적인가.)
문걸은 코로나에 걸려 입원한 딸 생각이 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햇쭉 햇쭉 웃는 걀죽한 얼굴이 핸드폰에 떴다. 물려받지 말라는 조개턱도 유표하게 쳐들렸다.
“지예야,”
“아빠!”
범이 자기 흉을 하면 온다고 뜻밖에 지혜가 문을 뚝 떼고 화실에 들어섰다.
“아버지!”
“지예야!”
부녀간은 순식간에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지예야, 문 앞에까지 와서 핸드폰 했어? 요것아, 얼마나 고생 많았니? 너네 삼모자녀가 몽땅 코로나에 걸려 진짜 못살 같더라.”
지예는 다 컸다. 아니, 많이 성숙됐다. 오히려 아빠를 위안했다.
“아빠, 울지 마세요. 아빠 젤 고와하는 딸이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엄마도 코로나 치료됐고. 오빠도 꼭 치료될 겁니다. 전 우리 새 중국 의료기술을 믿습니다. 엄마 암도 꼭 치료될 겁니다.”
부녀간이 끌어안고 대성통곡치는 판에 만금은 어쩔줄 몰라 주방에 들어가 식사준비를 했다.
침실에서 요염하게 생긴 미녀로봇이 살금살금 걸어 나왔다.
“무스메가 이랏샤이마시다까(딸이 왔는가요)?”
지예는 눈이 새똥그래 졌다.
“누군가요?”
지예는 미녀로봇과 아빠를 번갈아보았다.
미녀로봇이 종알거렸다.
“와다시와 찌찌노 도모다찌데스네(난 아빠 친구인데요).”
“여자친구?”
지예는 로봇인 걸 눈치 채지 못해 어리둥절해 아빠를 쳐다보았다.
문걸은 머리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아빠 고독해 일본 국제유화전시회에 갔다가 사온 미녀로봇 아사꼬야.”
“오-“
지예는 그제야 머리를 끄덕였다. 30대 초반의 딸은 아빠와 엄마가 이혼한 일을 상기하며 씁쓸하게 화실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아빠의 고독한 심정이 리해됐다.
숱한 보짐을 보자 지예는 의아했다.
“아빠, 이건 뭔가요? 혹시 화실을 팔자고 그래요?”
문걸은 쏘파에 맥없이 앉으며 한숨을 푸- 내쉬었다.
“그래.”
지예는 아빠 옆에 앉으며 오른 팔을 안고 물었다.
“화실 팔고 아빠 어데 가 살겠는가요? 집도 없이 살 아빠 참 불쌍해요.”
그러나 문걸의 마음은 굳어진 것 같았다.
“엄마, 암에 걸렸는데. 너네 엄마를 구할 수만 있다면 화실이겠느냐?”
지예는 진한 감동을 먹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녀는 이혼까지 한 아빠가 엄마를 구하려고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보통 부부간은 돌아누우면 남남이라지 않는가. 나도 이혼하니 슬기 아빠를 개 닭 보듯 하는데…엄마에 대한 아빠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깊을 줄은 몰랐어.)
지예는 또다시 아빠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빠,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면 자초에 이혼하지 말게지.”
문걸은 딸과는 진실한 말을 하기로 했다. 이젠 믿을만한 사람은 딸 밖에 없었다.
“자초에 너네 엄마 자꾸 나하고 이혼하자고 했지. 허나 이혼해주지 않았다. 나는 이 가정을 깨고 싶지 않았다. 네 엄마는 내 조강지처야. 우린 너네 오누이를 얼마나 고생하면서 키웠는지 몰라. 엉덩이를 들여놓을 만한 집도 없어 물독이 다 떵떵 어는 세집에서 살면서 너네 엄마를 얼마나 고생시켰는지 모른다.
그 세집은 주인 집 닭굴 자리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린 아주 달갑게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닭굴자리 세집에서 살지 않으면 안됐다. 제 집을 마련하자고 난 퇴근해서도 과외로 그림 그렸고 너네 엄마는 너네 오누이를 업고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출근했지.
쉬는 날에는 내 그림 그리면서 너네 오누이를 건사하고 너네 엄마는 카라오케이랑 나이트클럽에랑 다니면서 춤을 추고 사교무장에랑 가서 사교무를 가르치면서 푼돈을 모아 조그마한 새 집을 마련했지. 그때 우린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우리도 세집 살이 하지 않고 우리 둥지를 마련했지…그때 우린 가난했지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어.”
“아빠-“
지예는 아빠 두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미녀로봇이 손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문걸은 딸에게 속심을 계속 털어놓았다.
“그렇게 애나게 행복을 마련하면서 살아온 가정을 어찌 그렇게 쉽게 깬단 말이냐? 어찌 너네 오누이를 이혼한 부모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게 하겠느냐? 어떻게 너넬 머리를 들지 못하고 한풀 꺾이게 하겠느냐? 이혼한 집 애들은 다 한쪽 날개 부러진 애들이지.”
지예는 아빠 열변을 들으면서 마디마다 아빠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렇게 뇌까렸다.
(아빠, 지금은 리혼을 그렇게 나쁘게 생각하진 않아요. 오빠나 내나 다 그래서 이혼했는데요. 그러나 가정을 지키려는 전통파 아빠 감동돼요.)
문걸은 계속 열변을 토했다.
“나는 너네 엄마를 진짜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 내 가슴 속에는 너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얼기설기 깊숙이 뿌리내렸다. 그 사랑의 뿌리를 빼면 온 가슴에 피로 물든 상처 입을 거야.”
지예는 의아해했다.
“아빠, 그런데 왜 이혼했어요? 엄만 아빠가 이혼하자고 해서 이혼했다던데요.”
“그래. 내가 이혼하자고 했다. 그러나 마음에 내켜서 이혼한 건 아니였어.”
문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오랜만에 권연을 꺼내 붙여 물었다. 속이 탄 연기가 입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와 천정으로 타래치며 피여 올랐다.
“캑, 캑, 아빠, 담배연기 질려요.”
“그래?”
문걸은 인차 담배재떨이에 권연을 비벼 꺼버렸다.
“나라고 이혼하고 싶어 이혼했니?”
“그럼 왜? 엄마 암에 걸리니깐. 후회되는가요?”
“아니야. 사실 너네 엄마를 행복하게 살게 놓아주고 싶었다. 저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나는 비둘기처럼.”
“네?”
지예는 외까풀 눈이 새똥그래 졌다.
문걸은 사랑스런 딸 지혜를 빤히 마주 바라보며 정색했다.
“그때 난 암증에 걸렸댔어. 죽어가는 사람이 이혼하지 않겠다고 너네 엄마를 붙잡아두는 건 말도 안됐지. 너네 엄마 그렇게 이혼하자는데. 이혼해주면 너네 엄마 그때만이라도 아무런 부담도 없을게 아니야?
너네 엄마 왜 이혼하자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부담 덜자고 그랬겠지. 너네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보지 않아. 그저 황혼 길에 들어서서 쓸데도 없는 나그네 부담을 덜려고 이혼하자고 그랬다고 볼뿐이야.”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지도 마세요. 엄마는 절대 부담 덜려고 그런 거 같잖아요. 상해에서 다른 나그네를 보지도 않았어요.”
문걸은 이혼할 때 정경을 생각하자 좀 불쾌하기도 했다.
“그래. 너네 엄마 날 걱정 말고 상해에 돌아가 너네 애들도 돌보고 자유롭게 살라고 활 놓아주었다.”
지예는 도리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화실까지 팔아서 엄마를 구하려고 하니. 참 감동입니다 왜서인가요? 아빠.”
문걸은 이젠 30대 초반이나 되는 딸애는 자기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 활 털어놓았다.
“널 믿고 말하지만.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