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 자리에 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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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민족연합회 작성일25-07-20 15:29 조회1회 댓글0건본문
어릴 적, 이른 아침이면 아버지는 호미 두 자루를 손에 들고 어머니는 점심을 싼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좁다란 산길을 헤치며 산장 밭으로 향하셨다. 콩, 조, 옥수수 김을 매러 가는 길이었다. 나도 그 뒤를 졸졸 따라나서곤 했다.
산은 이른 아침부터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습한 흙길은 발바닥에 눅눅하게 들러붙었다. 풀잎엔 이슬이 맺혀 있었고 가끔씩 멧새가 가지를 흔들며 푸드덕 날아올랐다. 어머니의 발걸음 뒤에는 나의 작은 발자국이 이어졌고 그 발자국은 땀과 흙이 뒤섞인 가족의 삶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한여름 산밭에서는 땅 밑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지열과 머리 위로 작열하는 자외선을 견디며 아버지는 허리를 굽히고 어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호미질을 하셨다. 손등은 갈라지고 등은 햇볕에 그을려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늘진 나무 아래서 흙집을 만들고 맨땅에 나뭇가지로 글씨를 쓰며 놀았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던 시간이었다.
정오 무렵이면 샘가에 둘러앉아 점심밥을 나누어 먹었다. 잡곡밥에 물김치, 풋고추 몇 개와 고추장. 하지만 그 밥상은 땀의 양념이 더해져 꿀맛이었다.
“둘째야,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이 고생 물려받지 말아라.”
어머니의 그 말씀이 마치 낫으로 가슴을 도려내듯 깊이 새겨졌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예, 엄마.”
그러나 그 다짐은 중학교 졸업과 함께 무너졌다. 아버지의 한마디 호통에 떠밀려 나는 다시 논밭으로 향했다.
논김을 매는 여름은 참혹했다. 칠월의 불볕더위 속에 논배미에서는 물이 끓듯 거품이 보글보글 일었다. 바람 한 점 없어 벼 잎사귀조차 까딱이지 않았다. 일꾼들은 일렬로 늘어서서 서너 줄씩 맡아 벼 사이에 낀 잡풀을 골라내고 흙으로 덮어 주었다. 나는 겨우 돌피나 구별해내는 것도 힘겨웠지만 아낙네들은 잎의 색과 윤기만 보고도 단박에 뿌리째 뽑아냈다.
점심이면 논밭머리 맨땅 위에 비닐을 펴고 앉아 꿀맛 같은 밥을 먹었다. 허기진 몸이 밥보다 앞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시골을 떠나 나는 교원이 되었다. 분필을 들고 교단에 서서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꿈을 이야기하던 내 삶. 매 교시마다 희망을 말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주던 날들. 나는 사람이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를 말하며 스스로도 성장해 갔다.
그러나 그 삶도 오래가지 않았다. 15년 전, 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짐을 쌌다.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디던 순간, 나의 신분은 교원에서 이주노동자로 바뀌었고 교단은 식당으로, 분필은 서빙트레이로 희망의 언어는 주문과 인사말로 바뀌었다.
“어서 오십시오.”
“맛있게 드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교실에서 외치던 구호 대신 나는 식당에서 웃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루 12시간씩 서서 일했고 고단한 몸은 잠으로도 풀리지 않았다. 식당에서 집으로, 다시 식당으로 그 일상은 마치 기름칠되지 않은 쳇바퀴처럼 뻑뻑하게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가 덮쳤고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는데 내가 다니던 업체도 그만 문을 닫게 되어 나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삶은 또다시 낯선 길로 나를 밀어냈다.
지금은 공사장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밥을 허겁지겁 삼키고 낡은 작업복과 헬멧을 챙긴다. 철근공, 목수, 방수공들과 함께 해가 뜨기 전부터 현장에 모인다.
아침 조회에 모인 공사장 노동자들. 말없이 서 있는 그 뒷모습 속에, 하루의 무게가 느껴진다.
태양은 변함없이 매일 떠오르지만 우리의 일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대지에서 뿜어
오르는 열기와 직사광선 속에,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이마로, 눈으로 흘러내려 뜨겁기만 하다. 점심이면 보도블록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배달 도시락을 먹는다. 닭백숙도, 시원한 국물도 없다. 오직 허기를 달래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잠시 숨 고르는 짧은 휴식조차 사치로 보인다.
60년 세월,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초가집은 벽돌집이 되고 아파트로 변했다. 자전거는 자가용으로, 된장국 한 그릇으로 버티던 시대는 유기농과 건강식을 따지는 시대로 바뀌었다. 식사 후엔 노래방 대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사람들의 삶은 달라졌다. 그러나 단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노동자의 삶이다.
사는 곳이 달라져도
일하는 환경이 달라져도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그 고단함만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하다.
누군가는 시원한 사무실에서 세상을 논할 때, 누군가는 땅과 하늘 사이에서 오늘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다. 철근을 들고 시멘트를 붓고 벽돌을 나르고 땀을 훔치면서 노동을 즐긴다.
그래서 나는 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책임을 지고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땀방울 위에 오늘의 우리가 서 있다.
/신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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