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황혼녘이라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강유보도를 따라 조용히 거닐었다.
앙상한 나무 가지들은 바람에 몸을 떨면서 괴물 같은 긴 그림자를 던진다.
입춘이 지난지도 이슥하지만 겨울에 응고되었던 가로수들은 찬 기운에 아직 물이 오르지 못하고 외롭게 서있다. 눈주어 보노라니 내 마음이 괴롭기만 하다.
‘왜 이럴까? 봄은 만물의 꿈을 키우는 계절이라는데...’
나는 싸늘하게 식은 마음을 달래며 둑을 내려 왔다.
‘어마나!’
무엇인가 발부리를 매끄럽게 한다.
‘아니 이건?’
강 뚝 기슭에 애어린 풀들이 무더기로 나있다. 아직 진한 녹색은 띠지 못했으나 연두색을 띤 것이 제법 함함하다. 나는 너무도 기특하여 쪼그리고 앉아서 풀 한포기를 뽑았다.
그런데 땅에 뿌리를 꼭 박은 고것은 뽑히지 않고 흰 마디가 뚝 끊어져 나온다. 야들야들한 흰 대는 바람결에 바들바들 떤다.
아, 무엇이 그리워서 이런 어린 몸으로 이 추운 세상에 나와서 고생할까!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나의 앞에는 할 일들이 많고도 많다. 그것을 위해 나는 부지런히 뛰어야 한다. 말대로 통쾌하게 기지개를 펼 사이도 없다. 더더욱 문학의 길을 닦고 있는 몸이라.
그런데 문학이란 이 깍쟁이는 나에게는 대문을 빠금이 열어주고는 활짝 열어주지 않는다. 나의 정성이 모자라서인가 아니면 아직도 나의 문학적 재능이 무디어서인가? 그럼 내가 겨우내 잠들어 버린 가로수 신세란 말인가? 만약 내가 이 애어린 풀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이악스레 세상에 태어나서 이른 봄의 즐거움을 남 먼저 맛보니 말이다.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겨 애어린 풀을 어루만져 보았다. 애어린 풀은 몸을 휘우더니 다시 꿋꿋하게 일어선다.
아! 이 것이구나. 땅속에 든든하게 내린 그것, 뿌리구나.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신고스럽게 땅에 뿌리를 내려 자양분을 빨아먹는, 아니 생명을 지켜가고 봄의 꿈을 키워가는 그 정신, 누런 세계에서 파란 빛을 자랑하는 긍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머리는 무거워 진다. 나에겐 아직도 용기가 없지 않는가! 아니, 그보다는 의지가 없다. 이 세상에는 행운이 없다. 나에게는 문학에 발을 들여 놓을 용기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도 한 두 편의 글을 써 내도 발표되지 않으면 주저하여 중도하차 하지 않았던가.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어떨 때는 행운이 찾아오기만 앉아서 기다렸다.
생각해보니 공짜는 없다. 행운, 성공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없다.
문득 오직 저 새 싹처럼 용기와 의지만이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이 새싹처럼 고개를 쳐든다.
그렇지. 나도 문학의 꿈을 접지 말고 용기와 의지가 있다면 꼭 성공하리라고.
호의 ㅡ 호이 ㅡ바람소리가 들려온다.
강유보도에 늘어선 가로수 우듬지에서는 쏴ㅡ쏴ㅡ소리가 난다.
‘이젠 시간도 흘렀구나.’
나는 몸을 일으켜 어스름한 장막 속을 뚫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따라 씨엉 ㅡ씨엉 ㅡ 발걸음을 다그쳤다.
/신정국
2021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