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가 시작되던 때만 해도 40대였으니 꽃 보라 날리는 청춘이 춤 출 때였다. 1993년 중국 청도에서 학생들에게 한국 글을 가르치던 황금 계절이었다. 중국의 개혁 개방에 외자기업들이 밀물처럼 대륙의 방방곡곡에 쓸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더욱 기쁜 소식이라면 오래 동안 국경이 막혀 왕래가 없었던 인근 나라, 우리 선조가 계셨던 한국이 중국과 손잡고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분야에서 호상 교류한다는 기쁜 특보였다.
한국은 아시아의 경제발달국가로 당시 조선업이나 전자산업은 세계강국이었다. 이런 나라와 손잡고 나갈 중국 정부도 기꺼운 일이지만 중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겐 하늘에서 호박이 넝쿨 채 떨어진 비할 바 없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고국으로 가고픈 동포들은 금 물살을 타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십여년 사이 200만 중국동포의 절반 인구, 80만 인파가 한국에 입국하게 되었다. 중국에 있는 동포들께는 특대 비문이고 금시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도 고향이 전라북도 정읍이였다. 내가 여기서 우리 조상의 고향을 말 하는데는 까닭이 있다. 일방적인 한국 분들은 우리 동포를 한민족이 아니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이는 극단적이고 소극적인 자사 자리한 관점이라고 꼬집고 싶다. 어찌 언어가 같고 생김새도 같은데 한민족 아니라고 할까? 말로 표현 못 할 슬픔이기도 하다.
내가 교편을 잡은 중국학원은 대만사람이 꾸린 대형학원인데 청도시 황도경제개발구라는 신도시에 자리 잡은 학생이 수천 명 되는 큰 학원이었다. 학원생 모집조건은 졸업을 하면 외국기업에 취직시킴과 동시에 청도시 개발구 호구로 변경시켜준다는 우월한 조건이었다. 이처럼 좋은 소식을 접하자 학생들은 전국각지에서 천군만마같이 밀려왔다. 대학시험에서 낙방되어 실망한 학생들도 이 기회를 놓이지 않고 하루빨리 외래어를 배우고 취직하고 한국 유학까지도 계획하고 있었다.
청도시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들고 한국기업이 하루아침에도 우후죽순같이 치솟는 황금 계절이였다. 오죽하면 워낙 "황도(荒岛)"란 재황 입은 섬이란 뜻인데 한국기업이 밀물처럼 밀려와 공장이 숲을 이루자 금 같은 땅 "황금의 섬 黄岛"도로 변했다. 우리 원동학원(远东学院)은 시대 흐름의 금 마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려야 했다.
한국기업가협회 해설 책을 보면 청도시 황도 개발구에 입주한 기업만 해도 1,540개 기업이 있는데 여기에 필요한 직원은 엄청났다. 한개 기업만 해도 백여명에 달했다. 진도 컨테나 회사만 해도 사무실 일군 60명, 한국말 할 줄 아는 용접기술원 200명이 수요 된다는 것이다. 우리 학원은 가슴이 부풀어 미칠 지경이였다. 임무는 과중하고 시간은 짧다.
교원은 적고 학생은 많은데 한국말 할 줄 아는 학생은 한명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땅콩 볶듯이 재촉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또 생각도 없이 "선비가 책장을 기와 장 번지듯" 가르쳐서 될 일도 아니었다. 큰 학원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칠 선생은 나와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김채순 선생뿐이다. 내가 졸업반 2개, 중등 반 3개를 책임지고 5섯 개 초등 반은 김채순 선생이 책임졌다.
김채순 선생은 음악에도 미립이 튼 재간둥이였다. 학생들은 배움에 열정은 높은데 기초가 너무 박약하기에 배우는 시간에는 알지만 돌아만 서면 배운 것을 까맣게 잃어버리는 막연한 판국이다.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배운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게 하겠는가?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수업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고 한국어를 가르치기는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우선 우리말과 중국말 문법의 공통성, 발음의 동일한 면, 자모음이 배합되면 어떤 글자가 탄생하는가? 그 비밀이 무엇이냐를 노래가사로 작성한 다음 우리 민족노래 음률을 그대로 도입시켜 신나는 노래로 부르게 했다.
과연 학생들은 흥취를 느껴 노래를 때와 장소가 없이 길을 걸으면서도 숙소에서도 시간만 있으면 불렀는데 그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기뻐하였다. 초등반 한국말 수업시간은 아예 김채순 선생님의 음악수업 시간이였다. 이렇게 온 학교가 예술의 전당이 되어 버렸다.
일상대화가 아주 중요한데 당시 나는 실천 속에서 실물을 보고 단어를 느끼고 호상 대화하고 그 의미를 기억하는 습관을 키워 주었더니 자기들 끼리 배운 것을 주고받고 실습하였다.
그리고 학생들 데리고 한국기업들 참관시키고 이미 취직한 졸업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에게서 체험담을 듣게 하였다. 결과 한국말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모든 교학방법과 수단은 전부 노래와 결부시켰기에 학생들은 배움에 실증과 짜증을 몰랐다. 학생들의 배움의 적극성뿐만 아니라 기억력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 노래 부르는 우점이라고 느꼈다.
학생들은 하루하루 변하기 시작했고 한국말 예법대로 그 누구를 만나든지 깎듯이 한국말로 인사하는 습관을 키웠다. 일반대화를 열심히 반복하는 학생은 표양하고 장례하는 제도를 세웠다. 경상적으로 개인별로 반급별로 나중엔 학교별로 한국말 발음 겨루기시합을 가졌다.
선생이 애쓰고 정성을 다 했더니 학생들도 감동을 받았는지 온갖 열정을 다해 저녁 늦게까지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기숙사에서 엉뚱한 작곡과 작사가 동반된 노래가 희한하게 들려왔다.
차츰 배움에 신심과 흥취를 가진 학생들은 우리글이 자기들 글보다 아주 간편하고 또 발음하기도 편리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우리글 발음은 자기들 글 발음처럼 규칙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기도 간단하고 글의 수자도 얼마 안 되지만 내용 전달만은 동등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우점을 알았다. 와중에 학생들은 이런 위대한 문화와 문자발명이 세종대왕임에 감탄했다. 비록 수천 년 역사는 아니지만 "훈민정음"이 현대 세계문화발전역사에서 비교적 진보적 빛을 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학생들의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면 한국 글은 발음과 함께 글도 같은데 자기들 글은 같은 발음 속에 숱한 글자가 산생되는데 그 의미가 천태만상이고 복잡다단하다는 불만이였다.
학생들은 취직을 위해 배우던 데로부터 우리글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 열정과 흥취가 도고해졌다. 졸업하고 우리 한국기업에 취직한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좀 더 우리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라고 했다. 일부 발전성 있고 총명한 학생들은 취직 후 회사이름으로 한국 유학을 갔다.
1995년 청도시 외국어학원 예술 콩클에서 내가 지도한 원동학원 졸업반 학생들의 대합창이 12개 학원 가운데서 1등상을 받았다. 그날 우리의 대 합창은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리고 "아리랑" 노래였는데 우렁찬 노래소리는 온 장내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날 우리의 고국 한국 노래가 산동 땅에서 우렁차게 울리던 일이 어제만 같다.
해마다 우리 학원에서는 100명도 넘는 한국어 졸업반 학생들을 한국기업에 보내 기업의 인력난을 해결해 주었다. 그때 나는 우리 민족문화의 위대성과 값진 한국말의 우월성을 가슴 깊이 느꼈다.
/김지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