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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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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8-19 23:44 조회3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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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몇 십 년 별러 오던 “느릎터”로 가게 되니 마음은 한없이 설렌다. “느릅터”란 우리 어머님이 동년시기를 보낸 곳이고 그제 날의 옛 이름이다.

 

30여 년 전인 1993년12월 추운겨울, 우리 집에 왔던 어머님은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가며 다리를 다쳤다. 우리부부는 번갈아가며 어머님을 간호하였다. 어머님이 1919년생이니 그해 어머님은 74세였다. 병석에서 어머님은 연세가 있어서인지 동년을 그리며 “느릅터”를 외우며 가고 싶어 하셨다. 나는 어머님과 “느릅터”에 대해 여쭤보았다. 알고 보니 바로 당시의 도문시 월청공사 유기대대였다. 마을 어귀에 느릅나무가 있어서 “느릅터”라 불렀단다. 외갓집 마다바이가 어느 한번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며 어머님은 느릅터를 몹시 그리며 가보고 싶어 하셨다.

 

아니 유기대대?! 유기대대는 나에게 생소한곳이 아니다. 갓 단위에 출근하여 책보기를 즐긴 덕에 나는 1983년도 전주 림업계통 삼림자원 조사 학습반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 번 학습반은 도문시 장백려사에서 이론 학습을 하고 실습은 도문시 각 공사에 내려가 산과들을 오르내리며 삼림자원 조사를 하였다. 당시 우리 왕청조는 장안공사, 월청공사 등 여러 곳에서 삼림자원조사를 한적 있었는데 그때 월청공사유기대대 어느 마을 어귀에 있는 늙은 느릅나무가 퍽 인상적이었다. 어찌 보면 하늘의 안배인 것 같다.

 

헌데 당시 유기촌은 유기1대, 유기2대 등 여러 동네로 나뉘어져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느 동네에 느릅나무가 있었던지 기억이 잘나지 않았다.

 

왕청에서 도문 유기촌까지 다녀오자면 하루해는 잘 걸린다. 택시들이 막 생겨서 돈만 있으면 택시로 갈 수 있지만 다리를 다쳐 치료 중에 있는 어머님을 모시고 간다 해도 제대로 구경시켜드리지 못할 것이고, 또 하루 동안 달려야할 택시비도 아름찰 것이다. 나는 어머님이 치료하여 좀 나으면 그때 모시고 “느릅터”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평생 숱한 자식을 키우며 갖은 고생하시고 또 농사에 지친 어머님은 치료에도 별 효험 못보고 세상을 떠났다. 가슴이 터지는 듯 했다. 의사는 노인의 상처는 다시 회복되기 힘들다 했다. 그럼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가보고싶어하시던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도 풀어 드리지 못한 이 불효자식은 어머님이 세상 뜬 후에도 마음 한구석에 늘 “느릅터”가 자리 잡고 있어 기회가 되면 꼭 “느릅터”를 가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조카애가 운전하는 자가용으로 “느릅터”로 향했다. 나에게는 형제가 많다지만 윗 몇 분은 이미 세상 뜨고 누님 한분은 지팡이 신세로 겨우 걷는다. 좀 젊다는 누님은 굽은 허리에도 아이를 돌보는 “탈망살이”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차를 못 타겠다하고 그 외의 여러 형제들은 뿔뿔이 외국이나 먼 곳에 있다. 그럼 이 좋은 교통공구로 나 혼자가야하나며 나는 석현진 영창촌에 있는 이모 사촌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모사촌형님은 쾌히 같이 가보자 하였다. “느릅터” 위치를 똑똑히 모르지만 월청에 있는 조선족 민속촌 백년마을에 들려 구경도하고 그곳사람들과 알아보면 되는 것이다.

 

차는 영창에서 사촌형님을 태우고 석현으로 향했다. 사촌 형님은 옛날 길은 지금의 시멘트포장 길이 아닌 흙 자갈 길이였으며 지금의 산중턱엔 길이 거의 없었고 저 아래 산골짜기를 따라오다가 고갯길에선 몹시 가파로왔다 하였다. 차에서 내다보니 지금의 시멘트 길도 나무가 무성한 산속에서 꼬불꼬불 여러 굽이다. 꼬불꼬불 산길. 나의 생각은 돌아가는 차바퀴마냥 그 옛날에로 굴러갔다.

 

소학교 1-2학년 때, 나는 새끼돼지를 팔러 다니는 어머님을 따라 20여리길 걸어 왕청 장마당으로 자주 다녔다. 어머님은 새끼돼지를 넣은 마대를 등에 지고 마을을 벗어나 인적적은 꼬불꼬불 산길에서는 늘 신이 판난다며 흰 코신을 벗어 쥐고 모래자갈 흙 산길을 걸었으며 왕청어귀에 이르러서야 논밭 물에 발을 씻고 신을 신군 하였다.

 

장마당에서 점심때가 되면 어머님은 장마당 옆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 하나에 5전씩 하는 만두와 3전씩 하는 국물 한 사발 사주며 나더러 먹으라하고는 인차 새끼돼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 어른들 주먹마한 새하얀 만두와 기름이 동동 뜨는 국물이 어찌나 맛있던지.

 

허나 그때 내가 어찌 알았으랴. 어머님은 8전이면 해결할 수 있는 점심을 굶으면서 새끼돼지를 팔기 바쁘게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았는지 손에 필과 종이를 든 사람이 나타나 내라는 장세 몇 원은 두말없이 냈다. 그리고는 무더운 오후, 팔지 못한 새끼돼지를 도로 마대에 넣어 지고는 또 20여리 흙모래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면 돼지 풀 뜯어다 돼지죽을 끓여 주고 바로 저녁준비로 바삐 돌아치셨다. 저녁밥이 되면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먼저 상을 차려드린 후 우리 잔 식솔들의 저녁을 갖춰주셨다. 그리고는 쌀 한 알이라도 더 절약하느라 세투리 쌈으로 점심과 저녁을 에 때웠다

 

또 어느 한번 새끼돼지를 팔고 온 어머님은 “싸개 하던 새끼돼지는 어떻게 되였는지?”하며 근심하였다. 며칠 후 왠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와 그 새끼돼지가 죽었다고 하자 어머님은 두말없이 서까래 밑에 두었던 새끼돼지 값을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당시 어린 나는 우리어머님은 마음이 너무 어질다고 속으로 나무랐다. 허나 그때 내가 또 어찌 알았으랴 우리 어머님이 바로 근면하고 순수하며 고상함을 한 몸에 지닌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여인들 중 한분이라는 것을!

 

옛날 일들을 회억하노라니 어느덧 도문에 도착했다. 조카는 이번 걸음에 일광산 구경도 하잔다. 일광산을 구경하고 월청을 지나 백년마을에 이르러 문표를 사려는데 오늘은 “유람절”이라 절반 값을 받는다고 했다. 운전하는 조카가 출근을 고려해 일요일을 택했는데 생각 밖으로 반값이다. 어머님을 그리며 다니는 길은 마치 하늘도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는 상 싶다.

 

백년마을에서 못 하나 쓰지 않고 지은 조선족풍격의 가옥, 지금까지 130여년 세월 흘러도 기우러지지 않은 집 구경에 또 마음이 설렌다. 마당의 우물이며 사람을 태우는 가마며 그네며 집안의 구들, 식장, 모주석 초상도 오랜만이다. 그리고 집안에 제비 둥지까지 있다. 제비들의 지지배배 소리가 귀맛 좋게 들린다. 윗방엔 옛날 노인들의 사진들이 걸려있고 구들에는 장기판도 놓여있으며, 고방엔 여자들의 화장용 거울이 있다. 그야말로 옛날 어린 시절 고향집에 온 듯하였다.

 

백년마을까지 구경하고 나니 점심때인지라 음식을 청하며 복무원들과 “느릅터”를 알아보려 하였다. 헌데 복무원들은 모두 한족들이고 외지에서 왔다며 문표를 파는 사람과 알아보란다.

 

점심 후, 수소문 끝에 “느릅터”는 유기6대인데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마을 자리는 밭으로 변했으며 사유지라 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닫힌 철대문은 자물쇠로 잠겨 져 있었고, 대문양옆으로 철조망이 저 멀리까지 뻗어있었다. 여기까지 왔다가 몇 십 년 벼르던 “느릅터”로 가보지 못한다는 것이 될 말인가? 산 쪽으로 뻗은 철조망을 훑어보니 대문과 멀지않은 곳에 두 줄 철조망을 벌리고 사람이 드나들었던 흔적이 보였다. 나도 허리 굽혀 들어갔다. 흙길로 얼마 걸으니 시냇물 옆에 그제 날 느릅나무도 보였다.

 

1983년도 삼림자원 조사할 때 내가 보았던 느릅나무는 늙고 가지가 무성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나무중간이 꺾어지며 윗부분은 거꾸로 땅에 놓여 삼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엔 이곳에 집도 여러 채 있었는데 자금은 온통 밭으로 변했다. 같이 갔던 이모사촌 형님도 한전 밭이 마을 터 자리가 확실히 옳다했다. 어머님이 동년을 보냈던 마을은 없어지고 마을 전체가 한전 밭으로 변했다. 경제 발전은 인구 유동과 병행한다더니.

 

그제 날 다녔던 산과들을 둘러보노라니 또 옛 추억이 떠오른다.

 

내 나이 약 12-3세 때, 나는 어머님을 따라 외삼촌 집으로 간적 있었다. 어머님과 외삼촌은 오랜만에 만나여서인지 만나자마자 눈물이 글썽하였고 주고받는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때는 문화혁명시기라 교원으로 있던 외삼촌은 어머님과 지나온 일들을 조직에 교대하여야겠는데 어린 시절 일들을 이야기 해 달라 하였다.

 

“후- 그때 말들을 하자면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겠소? 끝이 없지.”하며 어머님은 그제날 일들을 말씀하시였다. 당시 나와 나이 비슷한 외사촌들과 놀면서 곁들은 한 토막은 말씀을 지금도 기억된다.

 

“하루는 엄마가 어디로 간다며 자네(외삼촌)를 보라하고는 집을 나섰는데 저녁에도 이튿날에도 오지 않았소. 나는 자네를 업고 밭머리까지 나가 눈 빠지게 엄마가 가던 쪽을 바라보며 애나게 기다렸소. 며칠 후에야 엄마가 먹을 걸 갖고 왔는데. 그랬기에 자네나 나나 집식구들이 굶어죽지 않고 살았소.”

 

우리 어머님은 위로는 오빠 둘이고 아래로는 동생 넷이며 룡정 외삼촌은 막내다. 그러니 그때 시걱 때면 모두들 우리어머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좋은 길도 아닌 이 산골짜기의 오솔길 20여리 길에서 우리 외할머니는 짐을 머리에 이고 집에 두고 온 애들을 걱정하며 잰걸음으로 부랴부랴 쌀이나 먹을 것 구하러 다니셨을 것이다. 우리어머님도 이 시내물가에서 또 이 느릅나무 아래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가난의 동년을 보냈을 것이다.

 

아-! 어머님, 어머님이 생전에 다녀보고 싶어 하던 “느릅터”로 이 불효자식이 오늘 와 봅니다. 어머님은 이곳에서 어린 나이에 때 이른 고생하셨고 후에는 우리8남매를 키우며 갖은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님의 희생적 고생이 있었기에 그 당시 험한 세월에 외갓집 식구들과 우리 8남매는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이 불효자식도 지금은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데, 어머님 일생의 몇십년 강산은 왜 그렇게도 변할 줄 몰랐는지?! 어머님, 어머님은 평생 너무나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위대한 어머님의 공덕이 책에는 기록 없어도 저 푸른 하늘엔 기록이 있을 겁니다.

 

나는 오늘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소리높이 외칩니다.

위대한 우리 어머님!

/김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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