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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니 짜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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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19-12-27 02:38 조회8,0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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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여동생이 경북 영주시 소수 서원과 선비촌 박물관에 다녀왔다며 새끼 꼬는 기계 사진을 가족 방에 올렸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거의 잊고 지냈던 나의 가마니 짜던 옛 시절이 눈앞에 떠올랐다.
 

1965년, 우리가 살던 길림성 영길현 양목공사 조가툰에는 거의 집집마다 가마니 짜기 부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처음부터 족답식 가마니틀을 쓰지 않고 목수인 아버지가 직접 만든 개량식 가마니틀을 사용했다. 두 발을 엇바꿔 한번 씩 밟으면 촘촘하게 박힌 쇠살 바디가 한번 올랐다가 내려오는데 이때 볏짚을 양손에 한 움큼씩 쥐고 있다가 가마니바늘이 날줄 사이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 한대씩 들여보내고 한대씩 끌고 오는 식이었다. 족답식보다 시간이 단축되고 효율이 배로 높은데 반해 두발과 두 손 간의 협응성이 잘 맞아야 하는 기술적인 숙달이 필수였다.

시초에는 가마니틀 앞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뿐이셨다.
양손에 잘 다듬어진 볏짚을 갈라 쥐고 두발과 두 손을 절주 있게 움직이며 가마니 짜는 숙달된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기계사람 같았다.

당시 10살인나는 새끼 꼬기 담당이었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면 아침에 추려서 물에 불궈 놓은 볏짚 한 단을 손으로 비벼서 다 꽈야 잘 수 있었다.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재미날 때도 있었다. 엄마가 새끼 꼬면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밤 가는 줄 몰랐고 또 가끔씩 같은 또래들이 방이 큰 조동희네 집에 가서 새끼 꼴 때면 서로 내기하며 꼬다보니 어느새 들고 간 볏짚을 다 소모했다.

닭 둥지만큼 둥글게 감은 새끼타래를 안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의 칭찬이 마냥 즐거웠다.

내가 11살 나던 해 겨울, 조가툰에는 한창 ‘사청운동’ (4구청산. 즉 낡은 사상, 낡은 풍속, 낡은 문화, 낡은 관습을 청산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언니는 생산대에서 조직하는 학습과 회의에 매일같이 참가해야만 했기에 집에는 나와 동생들만 남군 했다.

나는 손으로 비벼서 새끼를 많이 꼰 탓에 손금이 닳아 없어지고 새끼손가락 부위는 피가 날 정도였다.

당분간 새끼를 꼴 수 없게 되자 나는 아버지가 날줄을 쳐 놓고 간 가마니틀 앞에 앉았다. 근데 걸상에 앉은 상태에서는 발이 가마니틀에 닿지가 않았다. 나는 걸상에 엉덩이를 대는 둥 마는 둥 거의 선 상태에서 가마니 짜기를 시도했다.

양손과 두 발이 잘 안 맞아 헛방치기를 수차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 갔더니 점차 조화가 돼갔다.

부모님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 오셨을 때, 나는 가마니 한 장을 거의 다 짜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새끼 꼬기 담당에서 가마니 짜기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1967년, 내가 12살 나던 해에 우리 집은 길림성에서 흑룡강성으로 이사를 왔는데 우리 집의 가마니틀도 모터를 이용한 회전형 가마니 짜기 기계로 탈바꿈했다.

가마니틀이 반기계화로 바뀌자 새끼를 손으로 비벼서 이어대기는 태부족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도 새끼 꼬는 기계가 있게 되었다.

탈곡만 끝나면 우리 집은 가마니 짜기 부업을 시작해서 이듬해 봄까지 이어가군 했는데 지겨웠지만 유일한 수입 보충이었기에 싫어도 해야만 했다.

나는 매일 가마니 다섯 장식 짜서 귀밥을 엮은 다음 접어서 꿰매 놓군 했다.

나에게 가마니 몇 장을 줄 때도 있다. 나는 썰매에다 가마니를 싣고 합작사에 가져다 팔아 그 돈으로 학용품을 사거나 여성용품을 사기도 했다.

아픈 추억도 있다.
내가 고중에 입학 하던 해, 입학 통지와 함께 교내문예선전대원으로 선발되었으니 20일 앞당겨 등교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가마니 짜기 일손이 딸려 안 된다고 집에서 막는 바람에 결국 그렇게 바라던 문예선전대를 포기하고 말았다.

어느덧 세월이 가마니 짜던 그 시절을 싣고 간지도 40여년. 고달프고 지겨워서 해탈하고 싶었던 그때였건만 지금 이 시각, 밤늦도록 우리 집 방안을 맴돌던 “스르륵”, “툭” 가마니 짜는 리듬 소리가 새삼스레 그리워진다.

/이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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