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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곡/류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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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4-08 00:49 조회4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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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류수와 같다고 했던가. 어느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어언40년의 세월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 사이 강산도 몇번 변했건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 짙어만 간다.

 

1982년 12월 11일, 그 날 아침부터 날씨는 음침하여 당금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만 같았다. 새벽녘에 아버지가 아주 또렷한 모습으로 학교 기숙사문을 열고 나의 침대가로 살며시 다가와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였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뜨고 보니 꿈 이였다. 너무나도 이상한 꿈인지라 나는 이번 주 일요일에는 아버지 뵈러 꼭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흐리터분한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마음이 하도 심란하여 첫 두 시간에는 시간집중이 되지 않아 간신히 견뎌냈고 중간체조시간에는 밖에 나가 체조를 겨우 두어 번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교실로 돌아왔다. 새벽에 꿈속에 다녀간 아버지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좌불안석하는 사이 세 번째 시간이 되였고 어문선생님이 한창 강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교실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이 잠간 복도에 나가 두런두런 누구하고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다급하게 들어오며 정색해서 첫줄에 앉은 나한테 빨리 나가보라고 고개 짓을 했다. 학생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등에 업고 황망히 복도에 나가보니 담임선생님이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급히 나의 두 손을 꼭 잡더니 무거운 어조로 금방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 이였다. 청천벽력!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이런 비보를 듣고 보니 나는 목구멍에서 갑자기 뜨거운 것이 울컥하면서 저도 모르게 오열하고 말았다. 마치 시계의 초침이 그 순간에서 멈추면서 눈앞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전번 주에 집에 갔을 때 나하고 조곤조곤 이야기도 잘하던 아버지가 어쩜 아무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극도의 비통으로 머리는 텅 빈 것 같았지만 마음은 한시 급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고향집까지는 거리가 20여리 되는데 집으로 가는 석현행 뻐스는 매일 오전 7시와 오후 4시에 딱 두 번만 있다 보니 오후 4시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일각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는 비장한 결심으로 그 자리에서 신 끈을 졸라매고 선생님의 부름소리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이름을 부르며 학교대문쪽으로 뛰여갔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몽롱해진 시야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쏜살같이 고향 가는 방향으로 달음박질하였다. 하늘에서는 이미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모진 세월, 풍파를 겪어온 아버지이다. 일찍 아버지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 가야하강반의 하룡성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삼형제중의 맏이였던지라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농사일, 나무하는 일, 집안일을 가리지 않고 도맡았다. 농촌일로 다져온 아버지는 1950년대 후반에 강 너머 토성리촌으로 이사 와서 생산대 대장으로부터 민병련장, 치보위원, 주임 등 중임을 맡고 열심히 사업해왔다. 1964년부터는 대대당지부서기 직무를 떠맡고 농민들을 이끌고 수많은 일들을 하였고 상급으로부터 받은 상장만 해도 한 궤짝에 가득 찼다. 그 시기에 상장이 증거로 연루될까 봐 모두 태워버려서 지금은 한 장도 없어 안타깝지만 아버지가 해놓은 많은 일들은 산이 지켜보았고 들판에 오롯이 새겨졌다. 줄곧 당지부서기 공작을 맡은 아버지는 한점 흐트러짐 없는 정직한 분이였고 개인의 사욕이 없이 집체와 마을사람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했다. 아버지의 훈도하에 나는 일찍부터 항상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뚜렷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였다. 아버지는 나의 마음속 우상이였고 계몽선생님이였으며 든든한 마음의 기둥이였다.

 

도문기차역을 지나고 도문다리를 건너서 석현 행 국도에 올라서니 다니는 차량들은 거의 없었다. 한기가 뼈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아났고 입가에는 새하얀 입김이 서리서리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피어올랐다.

 

국도로 한참 달리니 저 앞에 향양촌이 보였다. 향양촌을 지나 앞 산굽이를 에돌면 수남촌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 산굽이를 따라 올라가면 일망무제한 논밭이 펼쳐진다.

 

옛날 수남촌은 산간지대여서 한전이 많고 수전이 적었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조이 탈곡이 끝나면 햇좁쌀을 이고 산 너머 린근동네에 가서 한 근에 웃돈을 10여전씩 더 주고 입쌀을 바꿔오군 하였다. 입쌀이 귀한 당지 사정에 비추어 아버지는 마을의 끌끌한 청장년들을 이끌고 수전개간에 나섰다. 물도랑을 내고 낮은 지세에 물방아를 세워서 산과 산 사이의 물을 옮겨오는데 성공하였다. 아버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논두렁 길을 넘나들었다. 동이 트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오듯, 자고새고 하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지 아버지는 우직하게 논밭에서 일만 수걱수걱 하였다. 저녁식사를 끝내기 바쁘게 맥진한 아버지는 푹 꼬꾸라져서 꿈나라에 들어가지만 날이 밝으면 논밭으로 나가는 일벌레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의 신근한 로동으로 근 천무가량 되는 한전은 옥답수전으로 되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이 이밥을 먹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수남촌의 입쌀은 소문도 자자하였고 수남촌은 부근에서 소문이 자자한 부유촌으로 되여 린근이 한족들마저 이사 오고 싶어 하는 마을로 탈바꿈했다. 한전을 수전으로 만든 수남촌의 일화는 왕청현정부의 표창도 받았다.

 

헐떡거리며 향양촌 산굽이에 도착하여 그 논밭들을 내려다보노라니 억척스럽게 일하던 아버지 모습이 아른거린다.

 

드디어 수남촌 대대마을에 들어섰다. 나의 얼굴은 얼어서 벌겋게 부어있었고 하얀 성에가 낀 머리에서는 흰 김이 모락모락 피여올랐다. 마치 북극에서 사는 유목민을 방불케 하는 나의 모습에 촌에서 맞띠운 사람마다 의아한 눈길로 흠칫하며 쳐다보았다.

 

“저 애가 도문시1중에 다니는 류하준 막내딸이요. 오늘 새벽 로서기께서 운명하셨다더니 저렇게 어린 나아에 차도 타지 않고 달려서 왔네...”

 

“어휴, 저 아이를 어쩌지…”

 

간혹 가다 뒤에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주고받는 말들이 귀가에 들렸다.

 

합작사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수남촌학교에 도착한다. 나는 소학교 5년과 초중 3년을 수남촌학교에서 다녔다. 내가 태어난 해에 ‘문화대혁명’이 폭발하면서 아버지의 박해 장면을 목격한 할머니는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끌려다니면서 투쟁을 받다보니 오빠와 언니들이 나를 업고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번갈아가며 빌어먹였단다. 내가 젖도 제대로 못 먹고 불쌍하게 자랐다고 항상 일이 바쁘셔서 자식들을 돌볼 사이가 없었던 아버지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유독 나에 대한 사랑만은 극진하였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쇠잔한 몸으로 쿨룩쿨룩 기침하면서 아침마다 나를 등에 업고 5리 길을 걸어 학교대문까지 데려다주군 하였다. 아버지는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는데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마다 나에게 책 속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은 선량하고 정직해야 하며 남을 많이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인생도리를 깨닫게 되였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등에 업혀서 아버지의 심장박동소리와 웅글진 목소리를 들으며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동년을 보냈다. 인젠 다시는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울음이 왈칵 터졌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애틋한 마음으로 수남촌학교를 지나 아버지가 나를 업고 다니던 토성리촌으로 가는 길에 올라섰다.

 

매번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아버지사랑을 떠올리며 꼭 마치 아버지 등에 업혀서 가는 것 같은 정다운 기분을 느끼며 걷던 길이였는데 오늘 따라 발밑에서 밟히는 모래들의 소리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허볐다. 원래 이 길은 평탄한 모래 길이 아니라 길 량 옆에 버드나무들이 빼곡히 늘어선 오솔 길이였다. 산사태로 골물이 터지는 날이면 모래와 돌들로 뒤덮여 오솔길마저 없어질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촌민들이 오르내리는 교통 편리를 위하여 6,000미터나 되는 제방을 건설하고 또 제방을 따라 넓은 모래 길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키 넘는 버드나무숲을 제거하고 기름진 한전을 개간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어깨에 지게를 메고 촌민들을 이끌고 일궈낸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며 오직 촌민들을 위하여 살아온 아버지생각에 또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숨이 턱에 닿아 목에서 겨불내가 확확 났지만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서 다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계속 앞으로 달렸다. 저 앞 모래 길 왼쪽에 자그마한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조금 올라가면 동골과 서골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두개 있다. 서골의 소나무 숲이 울창한 목도고개를 넘으면 산 너머 송림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는 일찍 이 산을 넘나들며 향정부로 회의를 다녔다.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때면 보통 날이 어슴푸레 어두워져서 산속에서 갖가지 짐승이 출몰하군 했다. 어떤 날에는 범까지 만날 때도 있어서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겨준 렵총을 갖고 다니면서 헛방으로 총소리를 내여 짐승들을 쫓으며 산을 타고 밤길을 누볐다.

 

회의에 갔다 온 이튿날이면 피곤도 마다하고 곧바로 회의를 소집하여 상급의 주요문건정신들을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이렇듯 열심히 공작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불시에 생뚱같이 ‘당권패’라는 루명으로 고깔모자를 쓰고 돌림시위행진에 끌려 다니게 되었다.

 

고된 매질과 가혹한 형벌로 아버지는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지고 엄중한 폐질환을 얻고 말았다. 정정하던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몽둥이 매질을 맞으며 투쟁 받는 아버지를 보시고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집안팍 일을 도맡아하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우사에 갇혀있다 보니 장래에 의사가 꿈이였던 큰언니는 눈물을 삼키며 학교를 중퇴하고 집안의 일을 도맡지 않으면 안 되였다. 그 어리러운 세월의 파고 속에 우리 가족이 당한 피해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강인한 아버지는 그 긴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다.

 

1977년 도문시당위원회에서 4명으로 구성된 공작조를 파견하여 2년간 아버지의 문제를 철저히 조사하여 아버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학교운동장에서 큰 대회를 소집하고 평판을 받는 날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만치에 마을 어구를 지키고 있는 늙은 비술나무도 알리라! 아버지가 얼마나 당에 충성하고 얼마나 당과 인민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땀벌창, 눈물범벅이 된 나를 늙은 비술나무는 따뜻한 아버지 품처럼 맞이해주었다. 아버지는 이 비술나무 아래에서 사원대회를 소집하였고 이 비술나무 아래에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농민들의 정황을 상세히 료해하기도 하였다. 주말마다 막차 뻐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이 비술나무 밑에서 손채양하면서 기다리던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얼어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다시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장장 20리 길을 나는 달음박질쳤고 숨이 턱에 닿아서 헐떡이며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길가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붉게 상기된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우리 집 앞에는 찌프차 두 대가 서있었고 문상 온 조문객들로 웅성거렸다. 먼발치에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허둥지둥 맨발 바람으로 급히 달려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한주 사이에 몰라보게 초췌해지고 폴싹 늙어버린 어머니, 이마의 주름은 더 깊어지고 헐렁한 흰옷을 입은 가녀린 몸은 슬픔으로 중심을 잃고 휘청이였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웃방에 올라가니 그토록 강경하던 아버지는 흰 천을 덮은 채 고요히 누워있었고 옆에는 정장을 입은 몇몇 간부들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 침대머리에 조용히 앉으며 나지막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한번, 두 번…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고 어머니의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때에야 나는 침통하게 실감했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고 아버지의 따뜻한 잔등에 다시는 기댈 수 없고 주말마다 집으로 오는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저 세상에 가는 그날까지 자신의 생활은 없었다. 오직 집체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다.

 

아버지가 떠나던 날 억장이 무너졌고 나의 하늘도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나는 생활이 궁핍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중을 졸업하고 중등전문학교에 붙었고 우수졸업생으로 정부부문에 배치 받아 성심성의껏 일하셨다. 때론 힘든 일에 부딪칠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어떤 난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인생에 남겨준 정신적 재부는 영원히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등대가 되여 나의 삶의 길을 고스란히 비추어주고 있다.

 

가끔 고향마을을 다녀올 때면 더욱이 여름철벼꽃향기가 그윽한 수전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마을의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일궈 옥토로 바꾼 순박한 농사꾼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 권세를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면 오늘 이처럼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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