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대학입시수업생’으로 뛰던나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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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4-19 23:31 조회426회 댓글0건본문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대학입시 때면 10여 년 전에 아들을 대신하여 고중 3학년 수업에 참가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대학입시를 앞둔 한 고중졸업반 교실, 수십 쌍의 초롱초롱한 눈길이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 학생들 속에는 50대 중반을 훨씬 넘긴 한 녀인도 들어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중년 녀인이 가끔 애들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군 하였다. 관례대로라면 대학입시생일 경우 18, 19세의 고중졸업반 학생이여야 한다. 그리고 대학입시에는 반드시 수험생 본인이 참가해야 될 텐데 어떻게 대리로 수업을 듣게 되였을가?
2010년 11월, 아들애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진작 접었던 대학입시에 참가하겠다고 하였다.
네 살 때부터 음악에 재질을 보였던 아들애는 초중 1학년을 마치고 연변예술학교 시험에 합격되어 작곡을 전공하게 되였다. 그런데 그 때 한창 사춘기를 겪던 아들애는 전공외의 문화과수업은 늘 빼먹고 허송세월을 하다시피 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전공외의 문화과는 거의 배우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리고 고중공부를 놓친 지도 4년이 넘는 마당에 어찌 6년 동안 밤낮없이 공부해도 힘든 대학입시에 도전한단 말인가?!
이제 와서 대학입시라니, 엄마인 나로서도 막연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랭수는 끼얹을 수 없어 “대학입시가 식은 죽 먹기인 줄 아느냐? 다시 잘 생각해보거라.”라고 애매하게 말하였다.
반달 가량 지난 어느 날, 아들애가 정색해서
“여태껏 저의 실력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는데 이번 대학입시에 한번 부딪쳐보려 합니다.”
하고 다시한번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의지를 밝혔다. 결심은 그럴듯한데 룡두사미로 끝날까봐 나는 저으기 근심되였다.
어릴 적 아들애는 명랑하고 령리한데다 심성이 착해 우리 가정에 항상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그러던 아들애한테 소학교를 졸업할 무렵, 느닷없이 사춘기가 불청객처럼 찾아왔다. 수업집중을 전혀 하지 않는가 하면 결석도 밥 먹듯 하였다. PC방에 출근하다시피 하다나니 학습성적은 일락천장이였다. 그리고 늘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남들과 소통하기도 싫어하고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였는데 반항심리도 만만치 않아 늘 부모와 엇섰다. 당시 온 시내의 PC방을 전전하는 것이 내 일과로 되였다. 나는 아들애를 사춘기의 수렁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군사학교’에도 보내보고 식당 복무원도 시켜보았으며 아들애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심리상담소에도 문턱이 닳도록 찾아다녔고 학급 담임선생님과도 늘 소통하였다. 어떡하나 아들애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수십장에 달하는 편지를 써서 아들애의 이불속에 슬그머니 넣어주기도 하면서 마음으로 감화시키려고 여러모로 왼심을 썼다.
그 시기 애간장을 태우느라 단 하루도 발편잠을 자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아들애가 이런 용단을 내렸으니 나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긴 하나 짧은 시간내에 대학입시를 준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들애가 심사숙고하고 내린 결정인지라
“그럼 좋다. 백배의 노력을 기울여 도전해 보거라. 네가 대학에 붙지 못해도 괜찮으니 있는 힘껏 밀어줄게!” 하고 김을 불어넣어주었다.
대학입시 등록은 12월 5일까지였으므로 서둘러 수속을 마쳤다. 예술 류 입시생들은 한 달 후인 이듬해 1월 10일 성통일전공시험에 통과되어야 문화과 대학입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전공시험만 준비하려 해도 시간을 쪼개 써야 할 판인데 이미 대학입시 모의시험이 3차나 지나간 뒤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하는지 도무지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온밤 실면하고 고민한 끝에 나도 ‘엄마’의 사명감을 걸고 도전하리라 다짐하였다. 우선 전공시험에 대비해 아들에게 각 과목 전공선생님들을 찾아주었다. 아들애는 찬바람이 살을 에는 동지섣달 엄동설한에 이 선생님한테서 저 선생님한테로 옮겨다니면서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이 돌아쳤다.
12월에는 한어국가등급시험을 쳐야 했는데 문화과 복습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엄마가 떠멜 수밖에 없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번개 불에 콩 닦을 기세로 인츰 문화과복습반을 수소문해 수속을 마치고 신화서점으로 달려갔다. 반나절 책들을 뒤적여 초중 1학년부터 고중 3학년까지의 정치, 조선어문, 영어, 력사, 지리 등 교과서를 1권부터 6권까지 한아름 사왔다. 산더미 같은 책들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났다. 난 비록 대학을 졸업하긴 했으나 전공이 리공과이고 손에서 교과서들을 놓은 지도 옛날옛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나이에 그 많은 교과서들을 이미 꽉 막혀버린 사유방식으로 읽는다는 것이 정말 지겹고 두려운 일이였으나 엄마의 사명감과 사태의 절박감이 나의 굳어진 머리를 다시 작동시켰다. 책무더기 속에 파묻혀 매 과목의 내용을 빈틈 있을세라 파고들었다.
침식을 잊어가면서 자세히 열독하고 필기를 까근히 하려 하였으나 력사와 지리는 우리 학창시절에 배우지 못했던 과목이여서 아주 생소하였다. 더우기 지리과목은 기초가 없으면 입문조차 어려웠기에 우선 기초지식부터 장악하고 그 다음 ‘교수안’ 작성에 들어갔다. 그렇게 읽은 책만도 몇 권은 실히 되였을 것이다. 아들이 헛되이 흘려보낸 시간을 반성하면서 어렵게 내린 결정 이였으므로 엄마인 나는 하늘에 가 별을 따오라고 해도 따러 갈 용기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문화과수업에는 엄마인 내가 대신 참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당시는 새 치아를 하려고 이미 발치까지 한 때여서 보기에 매우 흉측하였지만 더 늦출 수도 없는 일이였다. 반복적인 갈등 끝에 ‘에라,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깟 체면이 무슨 대수냐?’고 다지면서 손으로 입을 막고 복습반선생님과 학급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아들의 사정과 나의 의향을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학급 담임선생님은 77년급 조선언어문학학부 학우였다. 일순 주춤하긴 했으나 이미 마음을 확고히 다진 터라 눈을 질끈 감고 마구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달래면서 학급 담임선생님부터 찾았다. 학급 담임선생님이 가리켜준 교실을 찾아가 노크했더니 50대의 남자선생님이 나와 귀찮은 듯 한 표정으로 “수업중입니다.” 하고 말하고는 돌아서려 하였다.
내가 다급히 자초지종을 설명해서야 그 선생님은
“그럼 저 뒤에 가서 앉으십시오.”
하면서 막무가내의 표정을 짓는 것이였다. 교실의 수십 쌍의 눈길이 일시에 나한테 쏠리는 찰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런 ‘눈총’을 처음 맞는지라 이 ‘주책없는 아줌마’는 당금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한때는 그래도 남들의 흠모를 받는 흔치 않은 대학생 이였는데…’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간, ‘아니야, 지금 나는 오로지 둘도 없는 아들의 엄마인 거야!’ 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마구 밀어내고 나는 선생님의 강의에만 전념하였다.
그렇게 각 과목의 내용, 진도, 복습제강을 자세히 체크하고 중점을 장악하면서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마치 당년의 그 18, 19세 소녀처럼 말이다. 주변 애들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가 하면 학과목선생님들도 게면쩍어 했다. 원래 얼굴이 엷은 나였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얼굴에 철판을 깐 듯한 비위로 강의에만 몰두했다. 나는 책에 줄을 그어가면서 열심히 필기해나갔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엄동설한에 옹근 한 달 반 동안 ‘만근’하였다. 원체 허약한 내가 치아 때문에 죽으로 ‘연명’하던 때라 당금 쓰러질 것만 같을 때도 있었으나 그 때마다 ‘지금 나한테는 쓰러질 자유도 권리도 없다. 이를 악물고 버티자!’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또한 선생님들한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학급 애들과도 대화를 시도하면서 친숙해졌다. 아들의 전도를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였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각 과목의 중점과 내용에 대해 대체적으로 파악하고 아들의 전공시험이 끝나면 문화과 내용을 ‘인수인계’할 준비를 하였다. 그동안 아들애는 나름대로 전공시험준비에 심혈을 몰 부어 성통일전공시험에 합격해 대학입시에 참가할 자격을 따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문화과 학습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젠 내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리수업생’ 사명에 종지부를 찍고 학과목선생님들 그리고 나어린 ‘동창생’들과도 작별할 때가 된 셈이다. 정녕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운 심정이였다!
무려 두달간의 시간을 들여 아들애한테 그간 내가 수업에 참가하고 자습하며 분류하고 중점을 총화하면서 준비한 학습내용을 차근차근 전수하였다. 아들애가 문화과수업에 본격적으로 참가하자 각 과목들을 보충 보도하고 중점을 잡아주었다.
정상적인 궤도에 들어서자 복습자료만 제공하면서 나는 한보한보 뒤로 물러섰다. 대신 다섯 달도 안 되는 사이에 6년간의 과목을 복습하느라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큰 아들애의 정력에 도움이 되도록 영양 보충에 더욱 신경 썼다.
어느덧 대학입시가 시작되였다. 나는 긴장된 심정을 가까스로 억누르면서 아들애를 대학시험장에 들여보냈다. 그리고나서 시험장 주변에서 안절부절 바장이기만 하였다. 어느 과목, 어떤 류형의 문제에서 점수를 얼마나 따낼 수 있을까고 속구구를 하다보니 속이 재가 될 것만 같았다. 대학입시를 마친 10여일 후에 시험성적이 발표되는데 일각이 여삼추로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6월 20일, 아직 이르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온 하루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험성적이 언제 뜨겠는가만 애타게 기다렸다. 그 이튿날도 온 하루 실성한 사람처럼 컴퓨터 앞에 마주앉아 애꿎은 키보드만 두드렸다. 그 시각 별의별 상상도 다해보았다. 생각할수록 비관적인 점수만 머리에 떠올랐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아들애가 불쌍해 어쩌지?’ 하는 걱정에서 좀처럼 헤여나올 수가 없었다.
저녁 9시 쯤 되였을 때 컴퓨터를 열어본 아들애가 “와, 만세!” 하고 환성을 질렀다. 예상외로 시험성적이 높았다. 조선어문 135점, 영어 120점, 문과 종합 201점, 총점 456점이였다. 전업적 요소를 감안하여 환산하면 500점 이상 따낸 셈이였다.
아들애는 완전히 기쁨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우리 온 집 식구한테는 참으로 눈물겹도록 행복한 순간이였다.
시험성적이 발표된 후 기쁜 김에 학과목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더니 그들은 저마다 아들애가 짧은 시간 내에 거둔 성적에 탄복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학생들 속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처음엔 무척 불편하고 신경이 쓰였댔는데 얼마 후 안보이니까 오히려 궁굼해지더군요.”
이렇게 우스개를 하면서 경탄의 마음을 금치 못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 후 아들애는 블로그에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녀인이다’라는 글을 올리기까지 했다. 60고개를 바라보는 이 엄마의 외모가 아름다울 리 만무하련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내놓는 신성하고 강인한 모성애를 글에 담았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대학입시에 도전하려는 큰 결심을 내린 후부터 아들애는 밤과 낮을 이어가면서 피타는 노력을 쏟아부었다. 코피가 나고 입이 부르트는 건 례상사였다. 책상 맞은 켠에 격언을 붙여놓고 자신을 닥달하기도 했다. 나는 아들애의 도전정신과 담략이 기특하여 ‘나의 장한 아들아, 이 엄마는 네가 열심히 노력해줘 정말 다행이고 너무 고마워.’ 하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감지덕지하였다. 그리고 더없는 긍지감을 느끼고 한없이 감개무량하였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독차지한 엄마가 된 것 같았다.
얼마 후 아들애한테 연변대학 예술학원 입학통지서가 날아왔다. 드디어 오매에도 그리던 대학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 후 4년 동안 아들은 작곡을 전공하였고 이어 3년간의 작곡전공 석사연구생 과정을 마치고 영화음악의 꿈을 이루고저 수도 북경에 가 관련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아들애는 영화 ‘배은망덕’의 음악감독을 맡았는가 하면 국경 70주년 헌례영화 ‘결승시각’, 48집 련속극 ‘외교풍운’ 등 이름난 영화의 음악 제작에도 참가했다. 또한 호남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한 35집 련속극 ‘급속구원’에서 자기의 창작곡을 선 보였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인기가수 진상이 열창했다. 그 외 이름난 영화감독 진개가, 작곡가 담돈과 합작하는 기회도 가지였다.
아들애의 성장과정을 돌아보면 오직 엄마라는 리유로 체면도 불사하고 ‘대리수업생’ 역할을 담당해왔던 지난 일이 참 우스워나나 그 경력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거’로 되였다. /최정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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