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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미완성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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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2-03-11 03:11 조회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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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살이 굽이굽이 아리랑 열두 고개, 집집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듯이 나도 살면서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 문제들에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인생 매 단계마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참으로 벅차고 억척스레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내 인생의 끝없는 숙제를 완성하는 작업이 어느덧 습관처럼 굳어져버렸다.

 

‘숙제’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학생시절의 숙제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은 숙제를 완성하지 못하면 선생님의 훈계와 부모님의 질책부터 걱정한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매 단계마다, 인생의 매 고리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행하는 일을 다른 말로 숙제라고도 한다.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숙제는 그때그때 완성하는 습관을 들여야지 미루어 버릇하면 습관이 되여 무엇이나 다 미루게 되는 고질병이 생기게 된다.”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엄마가 어떻게 이런 명언을 남겼을가? 그 말이 우리 형제들에게 준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우리 여섯 형제는 어려서부터 숙제는 물론이고 무슨 일이나 미루지 않고 제때에 완성하는 습관에 길들여지다 보니 가정이나 사회에서 남들보다 더 충실히 살고 이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자화자찬해본다.

 

나이 들면서 어쩌면 우리 인생도 끝나지 않은 숙제라는 생각에 늘 감개가 무량해진다. 인생에서의 숙제는 바로 자기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인생수업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숙제는 농촌에서의 간고한 생활을 이겨내고 오래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대학 꿈을 이루어내는 것이였다. 1969년, 나는 열일곱살 어린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 농촌에 하향하여 집체호 생활을 하게 되면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게 되였다.

 

집체호에 간 그 해 가을이였다. 우리는 강 건너 산비탈에 있는 한전으로 조가을 하러 가게 되었다. 내가 간 그 마을은 돈화시에서 약 60킬로메터 떨어진 시골인데 산비탈에 자리 잡은 밭에 가려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큰강을 건너야 했다. 당시 그 곳은 전기도 금방 들어온, 뻐스도 통하지 않는 아주 외진 마을이였다. 큰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었다. 우리는 10명밖에 싣지 못하는 쪽배로 강을 오고가면서 일하러 다녔고 휴일이면 종종 산을 누비며 산나물 캐러도 다녔다.

 

그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집체호 호장이 갈아준 낫을 쥐고 친하게 지내는 생산대 대장집 딸과 함께 먼저 배에 올랐다. 장난기가 심했던 우리 둘은 배에서도 히히닥거리면서 장난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배가 맞은켠에 거의 도착할 무렵 무슨 영문인지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휘청거렸다. 우리 둘은 “어어” 하다가 어쩔 새 없이 함께 물속에 풍덩 빠져버렸다. 물에 빠진 우리는 허우적거리면서도 본능적으로 살려고 서로 손을 꽉 움켜쥐고 누구도 손을 떼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남성사원들과 함께 배를 타다보니 그들이 잽싸게 아침의 찬 강물에 뛰어들어 우리를 구해주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던 손목시계가 없어졌다. 그다지 비싸지도 않은 낡은 시계였음에도 어린 나이에 농촌에 하향한다고 할빈에 있는 큰형부가 보내준 선물이여서 소중하게 여겼다. 나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여 울었다. 온 마을에 손목시계라고는 나 혼자 가지고 있던 때였다.

 

옆에서 상심하여 우는 나를 측은하게 지켜보고 있던 부녀주임은 내 손을 꼭 잡고 “목숨을 살리고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금방 너희들을 구했을 때 둘이 꽉 끌어안고 한손에 쥔 낫 끝이 목에 대여 있었어. 정말 천만다행이야.”라고 따뜻하게 위로하였다.

 

그 날 저녁에 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는 언니가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왔다. 나는 다시 설음이 북받쳐 언니를 붙잡고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

 

“괜찮아, 목숨을 구했으면 되지. 그깟 시계는 언제든지 다시 살 수 있어.”

 

후에 언니가 알려줬는데 그 날 나는 온밤 잠꼬대를 하면서 시계를 찾았다고 했다. 내가 소리 칠 때마다 언니는 몇 번이고 화뜰화뜰 놀라 바로 자지도 못하고 온밤 옆에서 뜬눈으로 밤새우면서 울었다고 한다.

 

당시 전국적으로 대채를 따라 배우는 열풍이 일어났는데 우리 생산대도 례외가 아니였다. 산비탈의 밭을 허물어 다락 밭을 만드는 대공사가 벌어졌다. 매일 아침 종소리가 땡땡 울리면 우리는 눈을 집어 뜯으며 일터로 나갔다. 한창 잠이 많고 공부할 나이에 우리는 일을 해야 했다.

 

그 날도 나는 우리 집체호의 친구와 함께 멜대로 흙을 나르게 되였다. 넘치게 담은 흙광주리를 메고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참으며 한발작한발작 친구가 끄는 대로 따라가다가 그만 작은 돌멩이를 밟아 발목을 접지르며 가파른 산비탈에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가?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원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굽어보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뾰족한 돌멩이에 부딪쳐 다친 몸 구석구석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나 신음소리가 절로 나갔다.

 

그 날 밤, 나는 온 저녁 참기 어려운 고통이 몰려들어 앓음 소리를 련발했다. 그 후로 나는 일을 놓고 위생소에서 주사도 맞고 약도 복용하면서 상처를 치료했다. 그 때는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많고 많은 어려운 고비들을 이겨내며 용케도 버텨왔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나는 언젠가는 꼭 공부를 하고 싶었으며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잘 받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것을 이뤄야 할 목표로 삼았다.

힘든 체력로동으로 코피도 터지고 손바닥도 부르텄지만 나는 저녁이 되면 짬짬이 시간을 내여 책도 보았고 한어사전을 찾아가며 한어공부도 하고 일기도 빼놓지 않고 썼다. 또 고된 농촌생활을 체험하면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 역경을 이겨내는 법,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법을 익혀갔다.

 

이렇게 나는 인생의 숙제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정성이 쌓이면 뭐가 이뤄지기 마련이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그렇게 노력한 보람으로 나는 끝내 연변재정무역학교에 입학하여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였다.

 

내 인생의 두 번째 숙제는 녀자의 숙명을 완성하는 것이였다.

 

1976년 재정무역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하니 벌써 내 나이 25살, 한창 시집 갈 나이였다. 부모님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나의 배우자감을 찾고 있었다. 나는 배움에 목마른 사람인지라 학력을 배우자 선택에서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여기저기서 소개가 들어왔는데 그중 길림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는 대학생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사람은 째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인 데다가 아버지는 오래동안 와병하고 있어 로동력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지식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당시 그 이는 대학에 다니면서 기초보장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말린 무우짠지만으로 끼니를 이어가며 어렵사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지식인이면서도 훈훈한 시골 사람들의 인심이 뼈속까지 배인 사람이였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나는 그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3년 동안 련애하면서 나는 물심량면으로 그 이를 지원해주었다. 그 당시 나의 로임이 37원이였는데 로임을 받자마자 15원을 뚝 떼내여 그에게 부쳐주었다. 그가 대학을 무난하게 졸업하자 우리는 식을 올렸다. 결혼할 때도 나는 사돈보기, 례단 등 여러가지 례법들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보니 산 넘어 산이였다.

 

결혼 후 신혼이 다 뭔지? 현실은 달콤한 꿀맛이 아니였다. 시아버지 병시중도 탈망살이인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의 해마다 결혼하는 시동생, 시누이의 결혼준비까지 겹쳤다. 여러모로 가해지는 경제압력은 새각시였던 나를 쓰러지기 일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새각시로서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니기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지라 단위 호조금관리를 하면서 그때그때 보리고개를 넘어갔다.

 

한번은 남편이 출장 갔다가 돈지갑을 잃어버려 현금 60원이 급히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행여 남편사업에 영향이 갈까봐 급한 불부터 끄려고 호조금에서 60원을 돌렸다. 그런데 며칠 후 시골에서 대리교원하던 막내시누이가 나를 찾아와 해쭉 웃으면서 오빠가 돈을 구해줘서 학교 교원들과 함께 북경 구경을 잘했다면서 나한테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 일로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다투게 되였다. 지금생각해보면 큰일이 아닌데도 그 때는 하도 어려운 살림에 그렇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앉았던 것 같다.

 

시간이 얼마간 지난 후에야 우리는 화해하고 몇 가지 약속을 했다. 그 후부터는 크고 작든 간에 집안일은 먼저 의논하고 결정하였다. 그 덕에 지금까지 무난하게 잘 살아온 것 같다.

 

어느덧 우리가 결혼한 지 거의 40년이 되여간다. 귀여운 딸애도 낳고 자잘하고 사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푸근한 맏며느리 역할도 맡아왔다. 시누이, 시동생들도 맏며느리인 내 손으로 결혼식을 치러줬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환갑잔치도 남 못지않게 차려드렸으며 두 분이 병환에 계실 때도 지극정성으로 돌봐드리고 세상 뜰 때까지 마음 다해 모셨다. 직장에서 한자리하던 남편도 정년퇴직하였고 딸은 영국 유명 대학의 석사학위, 청화대학 석사학위를 따고 요즘 말로 잘 나가고 있다. 주위의 지인 분들이 나를 보고 성공한 녀자라고 말한다.

 

이제 내 앞에 차례진 인생 세 번째 숙제는 보람 있는 후반생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건강부터 잘 챙겨야겠다. 건강해야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즐기고 공익사업에도 많이 참여하여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2003년부터 나는 연변신세기리더십센터 소장직을 맡으며 근 15년간 1,500여명의 학원생들을 수료시켰다. 62기까지 학원생들을 수료시키면서 나는 재능봉사와 배려심이 뼈속까지 배게 되였고 이제는 아예 체질로 되어버렸다.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한 학원생들을 보면서 더없는 보람을 느끼고 가슴이 뿌듯해나면서 짜릿한 행복감에 전률한다.

 

이외에도 나는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적극 참가하고 있다. 꽃망울대학교입학등록금지원, 연변대학 평생교육동문회 연구생 대학 장학금지원,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사랑으로 가는 길’ 불우이웃돕기 등에 저그마한 후원금이라도 꼭꼭 지원을 한다. 그리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 ‘녀성세계’프로그람, 연변인민방송국 여러 가지 프로그램, 연길아리랑방송에도 나가 객좌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내 나이 70에 내 이름 세자가 박힌 책 한권을 출판하는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려고 독서량도 늘이고 자료들도 차근차근 준비하며 짬짬이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어느덧 문학아카데미에서 발표한 글이 이미 10여편 되였고 ‘애심녀성컵’ 응모작품으로 ‘연변녀성’잡지에 발표된 글도 5편이나 된다. 이렇게 부지런히 더 발표하면 책 한권이 되는 것도 멀지 않다.

 

이만큼 살아보니 삶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것 같다. 여직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이제부터라도 길지 않은 인생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을가? 와인 잔 기울이며 남편과의 데이트도 즐기고 려행도 많이 하면서 잔잔한 행복 속에 자잘한 것들에도 감동하며 쉼표 인생의 묘미를 찾아 볼란다.

 

앞서 집체호 때 친구들 3.8절모임에서 한 중학교 동창이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모두들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 저세상에 가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번 병마와의 시련을 겪었었다.

 

1997년 음력 8월 초열흘,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자궁의 혹을 떼내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나는 눈앞이 캄캄하여 견결히 수술을 만류하고 보수치료를 받으려고 어린애마냥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 한창 내 인생의 전성기였던 40대 중반에 이런 청천벽력이 내리칠 줄이야! 의사선생이 수술을 받지 않으면 나중에 종양이 악성으로 전환될 확률이 90% 된다고 알려줘서야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살고 싶다는 욕구와 가족의 권고로 나는 수술받기로 결심 내렸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였고 악성 종양이 아니였다. 그 번 고비를 넘기고 나는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였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려고 더욱 노력했던 것 같다.

 

한번은 ‘존엄을 지키는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연에 참석한 적 있다. “60대에 들어서면 죽음에 대한 준비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는 강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너무 와 닿았다. 얼마나 오래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제 남은 인생을 건강도 챙기면서 취미생활도 마음껏 즐기고 싶다. 봉사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살고 싶다.

 

앞만 보고 힘들게 달려온 내 인생,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나다. 결과보다는 인생 숙제를 하나하나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즐기다 보면 내 인생 퍼즐도 바야흐로 수려한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여가겠지. 나는 미완성된 그림 앞에 서서 벌써 혼자 감동하고 있다. 인생을 즐기면서 숙제를 완수해나가는 과정에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을 나를 떠올려보니 눈시울이 뜨거워난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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