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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든든한 뒷심, 김보옥 동창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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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금화 작성일21-10-17 23:33 조회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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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옥은 목릉조중 나의 한 학급 동창생이다. 중학교 3학년부터 그의 대수(수학) 성적이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33명중 그의 대수(수학)과 성적이 1위였고 나는 2위였다.

 

"여자한테 지다니, 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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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력을 다해 공부를 했는데 고중 입시성적은 더 비참했다. 진학생 22명중 그의 성적은 2위였고 나는 5위였다. 고중 1학년 후학기에 나는 여러 가지 병으로 휴학해 보옥동창의 하급반생이었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고중 2학년 전학기 까지 고중 3학년 학과목 진도를 끝내고 고중 2학년 후학기에 대학입시시험을 보겠다고 신청했다.

 

성교육청의 모의고시를 치러 56명중 5명이 허가를 받았는데 나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별뤘다.

 

"보옥이 누가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가를 두고 보자."

 

내가 대학 응시 준비를 잘하고 있을 때 날벼락이 쳤다. 문화대혁명의 폭발로 대학으로 가는 길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고중 졸업 무렵 보옥동창은 농민자녀라도 운이 좋았다. 1967년 12월 목릉에서 우리말방송을 시작하면서 그는 아나운서로 뽑혀 동창생중 그 혼자만 월급쟁이 대오에 들어갔다. 나는 회향 지식청년 모자를 쓰고 광활한 천지로 갔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역사반혁명 모자를 쓰자 검은 오류분자 자녀로 몰려 힘들고 위험한 일터로 쫓겨 갔다. 1년이 지나자 더는 그런 일터가 없는지 반란파들은 나를 마을 밖으로 내몰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아침에 나의 귀가 곤두섰다. 마을의 확성기에서 김보옥 동창의 그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나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원고를 써도 될까?"

고민 끝에 나는 대대혁명위원회 주임을 찾아가 물었다. 리윤수 주임의 대답은 간단했다.

 

"너의 아버지 역사문제도 곧 해명되니 원고를 써도 된다. 중요한 것은 나한테 먼저 보이고 투고해라."

 

나는 아버지의 역사문제가 곧 해명된다는 리주임의 말씀에 더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새 힘이 솟구쳤다.

 

저녁에 취재한 것을 새벽 4시에 일어나 원고지에 옮겨 썼다. 일반 기사는 아침 출근 전에 4리 떨어진 현 방송국 조선어편집부 서신함에 넣고 달려와 아침 먹고 출근한다. 중요한 원고는 점심시간에 리주임한테 심사받았다. 그 길로 현성에 있는 우체국에 가 8전짜리 우표를 사 붙인 후 성 신문사와 성 우리말 방송국에 보냈다. 급기야 달려와 오후 출근을 한다.

 

이런 나를 보고 대대혁명위원회에서는 통신조 조장으로 임명했다.

 

그 후 마을에 취재 온 보옥동창은 나를 보고 혼자 원고를 쓰지 말고 통신원 3명이상 양성하라고 했다. 나는 그의 권고대로 글쓰기 애호가 6명을 찾아가 함께 원고를 쓰자고 말했다. 그들은 촌에서 외면 받던 나를 동정해서인지 두말없이 동의했다.

 

내가 하서조선족중학교 조선어문 교원이 되자 보옥동창은 또 새로운 건의를 했다. 학생들 중에서 통신원을 양성하면 어떨까?

 

좋은 건의였다. 그때 나는 어문시간에 편지를 어떻게 쓰나, 일기를 어떻게 쓰나, 회고록을 어떻게 쓰나 등 글짓기 요령을 가르치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교도처의 동의를 얻고 “원고를 어떻게 쓰나”를 수업에 증가했다.

 

그때 10여명 통신원을 양성했다. 학교 졸업 후 그들은 마을의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2년 후 나는 조선족 통신간사란 패말을 달고 현 당위 선전부에 출근 했다. 그 누구도 조선족 통신간사의 업무를 알려주지 않았다. 조선족 통신간사 사업은 백지와 다름이 없었다. 별수 없는 나는 보옥동창을 찾았다. 그 자리에 함께 한 채홍운 편집, 김정옥 아나운서도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결론은 4가지로 요약했다.

 

첫 번째. 19개 조선족마을에 통신조를 설립하고 골간 통신원을 양성한다.

두 번째. 1년에 2차례 현 조선족통신사업회의를 개최한다.

세 번째. 흑룡강신문 발행부수를 높이는 한편 성과 현의 우리말 방송 청취율을 올린다.

네 번째. 조선족 마을에서 해결하기 힘든 사건을 현 관계부처에 반영해 해결 받게 노력한다.

 

나는 이 4가지 사업을 추진 하기 위해 1년 사이에 19개 조선족마을에 3번씩 다녀왔다.

 

결과 흑룡강신문사와 흑룡강조선어방송국에서 연합으로 개최한 흑룡강성 조선족 통신사업 회의서 목릉이 우수했다. 나는 우수통신간사 표창장을 받았고 목릉현 조선어편집부, 팔면통진 화평촌 통신소조, 하서향 보흥촌 통신소조도 우수통신소조로 표창장을 받았다.

 

1978년 3월, 내가 연변대학에 다니자 보옥동창은 나의 후근 부 부장이었다. 5년간 월급날이면 2리 떨어진 현 우체국에 가서 나의 월급 37원을 송금했다. 그리고 명절마다 직장에서 나누어 주는 복리품을 꼭꼭 챙겨서 4리 떨어져 있는 나의 집에 갖다 주었다.

 

내가 병에 걸려 출근하지 못할 때도 그는 료녕성 반금시로 이사가 10여년 만나지 못했다. 2013년 6월에 나는 한국 신길동에서 보옥동창을 만났다.

 

그는 료녕성 반금시에서 아리랑예술단을 세우고 우리 민족의 예술과 풍속문화를 낯선 곳에 보급했다. 한국에 나온 후 아리랑 예술단을 이어 간병 일을 하면서 짬을 타 사회 봉사활동을 해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이미지를 높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중방송에서 아나운서 3총사 맴버로 활약했다.

 

이 시기에 나는 손맥을 놓고 문자메시지를 보낼 줄도 몰랐다. 그러던 내가 정신이 들어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되자 회고록을 타자해 보옥동창에게 수정을 부탁했다. 그때에 그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고무를 받은 나는 연이어 8편을 한민족신문에 발표했다. 지난해 3월에 나에게 새로운 건의를 했다. 한국 kbs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에 투고하라면서 투고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알려주는 대로 2편을 투고했더니 2편 다 우수작에 평선됐다.

 

지금 김보옥 동창의 든든한 뒷심에 밀려 나는 계속 앞으로 나가고 있다.

/최영철

부천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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